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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지/short book

[스팁토니]Today I'm a Dog

추적추적 내리던 빗줄기 소리는 이제 점차 무게를 실어 굵어져가고 있었다. 막사 안으로 들어선 버키는 군복에 틘 빗방울을 털어내다가 구석에 앉아 이마를 짚고 있는 스티브를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전쟁터를 누비던 캡틴 아메리카의 용맹함과 어울리지 않는 친구의 모습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몸은 좀 어때?”

, 버키.”


마치 그제야 버키의 존재를 눈치 채기라도 했다는 듯 스티브가 고개를 돌렸지만 버키는 이미 그가 한참 전부터 자신의 접근을 알고 있었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단지 쏟아지는 빗줄기 소리만으로는 센티넬의 예민한 감각을 둔화시킬 수는 없을 터였다. 모두가 휴식을 취하는 짧은 순간까지도, 스티브는 전선에서와 다를 바 없는 감각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자의라기보다는 강제에 가까웠다.


이번 가이드도 영 효과가 없었어?”

항상 그렇지, .”


스티브는 쓴 웃음을 머금으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스티브를 바라보는 버키의 시선이 더욱 걱정으로 물들었다.


인류의 기적이라 불리 우는 센티넬은 강인한 만큼 약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컨트롤 해줄 가이드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이었고, 불안전한 전쟁의 시대에 태어난 만큼 가장 앞장 서 벼랑 끝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건 스티브 역시 다를 바 없었다. 브루클린에 태어난 작은 소년은 센티넬이라기에는 일반인에게조차 미치지 못한 약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이 소년이 센티넬일 것이리라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소년 자신 역시 간간히 올라오는 두통과 토기를 자신의 오랜 질병의 일종일 것이리라 지레 짐작할 뿐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면서 센티넬은 나라의 귀중한 전력이 되었으며 센티넬을 찾기 위한 정밀 검사는 마침내 스티브의 양성 반응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결국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돌연변이 센티넬은 버키와는 다른 입대 절차를 통해 군 연구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버키는 그곳에서 스티브가 어떤 실험을 당하였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연구실에서의 일은 국가 기밀이었고, 스티브 스스로 말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그 실험은 스티브에게 처음으로 센티넬로서 걸 맞는 신체를 주었을지 몰라도 그와 비례해진 고통에 대한 책임은 지어주지 않고 있었다.


차라리 가이드라도 제대로 배정받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버키는 빗줄기들이 여린 잎사귀들을 내리치는 걸 바라보며 속말을 삼켰다.


실험이 있기 전부터 선천적으로 스티브가 가이드와 맞지 않았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강한 센티넬인만큼 그에 걸 맞는 특별한 가이드가 필요했으며 긴 전쟁기간 중 센티넬만큼이나 희귀한 가이드를 정확하게 찾아내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스티브에게 시간이 주어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캡틴 아메리카는 센티넬 이전에 병사들의 정신적 지주였기에.


다른 센티넬들이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폭주해 미쳐버리고 말았을 것을 스티브는 하루에도 수 십 번씩 가이드가 아닌 진정제를 투입함으로써 겨우 전쟁을 버텨나가고 있었다.


위에서는 뭐래? 새 가이드를 보내주기는 한대?”

이주 뒤쯤 후에 새로운 가이드가 온다고 하니 거기에 희망을 걸어봐야지.”

잠깐, 이주라고? 우린 내일 모레 바로 하이드라 기지를 쳐들어갈 거라고. 너 설마 또 그 몸 상태로 작전을 이행하겠다는 거야?”

버키.”


스티브의 목소리는 아무런 어조도 담겨있지 않았다. 다음에 나올 대답이 이제는 지겹게 느껴질 뿐이었다.


난 괜찮아.”


그 말을 끝으로 스티브는 자리에 일어나 막사 밖을 나갔다. 분명 버키의 한탄 섞인 잔소리를 더 듣고 싶지 않다는 의사였을 터였다. 버키 역시 더 이상 스티브를 붙잡지는 않았다.


괜찮긴 무슨.”


내가 널 봐 온 세월이 몇 년인데 속일 걸 속여야지. 버키는 스티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센티넬이 되어버린 친구는 이제 더 이상 자신에게마저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 낯선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다. 요란한 먹구름 소리가 막사 위로 들려오고 있었다.


언제쯤 스티브의 가이드가 나타나줄 수 있을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 § §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조명들 사이, 스티브는 순간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있어야 하는 건지 의문을 느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쉴 새 없이 터져대던 폭약소리와 전우들의 외침만이 가득하던 세상에서 지금 스티브의 귀를 쉴 새 없이 괴롭히는 것은 누군지도 모를 고위층들의 시시한 농담과 웃음소리뿐이었다. 스티브에게는 그저 의미 없는 소음들이었다.


스티브가 잠들었던 70년이란 시간은 그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너무도 많은 것이 변화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 상상으로만 생각하던 편리품들은 이제 대중들에게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일상에 녹아있었고, 그들이 나누는 이해 못 할 대화들은 그 의미조차 알고 싶지가 않았다. 이름밖에 남지 않은 과거의 영웅은 소음들 속에서 여전히 전쟁터에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캡틴 아메리카. 캡틴 아메리카. 살아 돌아온 역사에 대한 쉴드의 칭송은 메아리처럼 스티브를 괴롭혔다. 그들의 기대 소리는 전쟁터에서의 병사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웨이터가 스티브의 안색을 보고 괜찮으시냐 물어왔지만 스티브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사람들을 피해 테라스로 걸어갈 뿐이었다.


저 멀리 그를 호위 임무라는 명목으로 파티장으로 끌고 온 피어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별 말 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아마 아직 스티브가 현대에 적응하기에는 무리였음을 재확인한 거 정도로 만족했을 것이었다.


테라스 문을 열자마자 구역질하듯 허리를 숙여 한참을 웩웩거려도 속은 좀처럼 좋아지려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 머리가 아파져왔다. 차라리 그 얼음 속에서 모든 게 끝나버렸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더 이상. 조금만 방심해도 숨을 쉬는 법을 까먹을 것만 같은 느낌에 스티브는 버릇처럼 가슴 부근을 매만졌다.


70년 동안 잠이 든 건 그 혼자만이 아닐 터였다. 가이드 없이 방치된 센티넬은 이전보다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스티브에게 폭주를 강요하고 있었다.


역시 이런 곳 오는 게 아니었는데. 스티브는 입가를 닦으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장소도, 시간도 모두 그와는 맞지 않는 것 들 뿐이었다.


찬바람이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걸 내버려둔 채 스티브는 테라스와 아래와의 높이를 쟀다. 이대로 머리부터 떨어진다면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부질없는 희망사항이어도 시도는 해볼 가치가 있을지도 몰랐다. 뒤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파티소음들을 피하듯 스티브의 몸이 점점 더 앞으로 기울어져갔고 발은 조금씩 들어 올려져갔다.


그때, 문득 스티브의 시선이 한곳으로 옮겨졌다. 왜 유독 그쪽으로 고개를 들린 건지 자각할 수는 없지만 시선 너머 갈색머리의 남자는 스티브의 온 신경을 집중시키도록 만들고 있었다. 한순간 몸이 떨리기 시작하면서 식은땀이 머리에 맺혔다. 가빠진 숨은 지금까지의 센티넬 부작용과는 다른 느낌으로 스티브에게 무언의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였지만 가슴 속 깊숙이 그리움이 올라옴과 동시에 무엇인지 모를 감정들이 느껴졌다. 스티브는 이것들을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같은 센티넬들에게 이것에 대해 수 백 번도 넘게 들어왔으며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하였었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남자는 대화가 끝나자 더 볼일이 없는지 발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조급함을 느낀 스티브는 거의 담장을 뛰어넘듯 가볍게 난간을 뛰어넘어 착지했다. 누군가 보았더라면 반쯤 난간에 기울여 있던 탓에 실수로 추락한 것이리라 착각했을 테지만 발이 채 바닥에 닿기도 전에 남자를 향해 내달리는 스티브의 동작은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스티브가 채 발을 옮기기도 전에 뒤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터져왔다. 콰광-! 지면의 흔들림과 함께 유리와 불꽃이 섞여 사방으로 튀어졌다. 깨진 유리창 내부 안으로 새어나오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검은 연기를 잠시 올려다보던 스티브는 곧 다시 남자가 있던 방향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 짧은 사이, 남자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고, 남자의 신변이 걱정이 된 스티브의 발걸음은 빨라지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폭탄이 터진 장소에서 멀리 벗어나고자 출구를 향해 달려온 사람들 탓에 파티장 바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 상태였다. 언뜻 자신에게 호위를 맡겼던 피어스가 다른 쉴드 요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저택을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지만 스티브는 자신에게 내려진 임무 따위에는 더 이상 관심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어딘가 일행을 찾는 소리와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목소리, 그리고 또 다시 들려오는 폭발음. 모두 스티브를 방해하는 소음들뿐이었다.


스티브는 거칠게 호흡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대로, 이대로 그를 놓친다면 또 다시 70년간 얼음 속에 쳐 박히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거의 발버둥을 치듯 스티브는 팔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사람들을 사이를 헤집었다. 그 순간, 골목 안쪽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음들 사이에서도 또렷한 목소리.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였지만 스티브는 이 목소리의 주인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스티브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괜찮아, 자비스. 오늘은 인사 정도로 한 거뿐이니까.”


골목 안 쪽, 커다란 붉은 아머 앞에 선 채 대화를 나누는 이의 모습은 역시 그 남자가 분명했다. 인기척을 느낀 듯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잠시 놀란 눈으로 스티브를 쳐다보다가 부드럽게 눈가를 접으며 웃어보였다.


, Hi, Dear."


남자의 웃음은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당당함과 여유로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단지 눈앞에 그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짓누르던 바위가 모두 사라져버린 기분에 멈춰있던 스티브의 시간이 그를 중심으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미소가. 그 눈빛이. 스티브, 자신을 향해 있었다. 스티브의 발이 한걸음 더 다가갔다.


내가 아는 캡틴 아메리카는 여기 말고 다른 쪽에 더 관심을 가질 줄 알았는데, 내 생각하고는 많이 다른가봐?”


더 가까이 보고 싶다. 닿고 싶다. 안고 싶다. 조금만 더. . 그러나 스티브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전 뭔가 낌새를 눈치 챈 듯 아머가 남자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서 보였다. 자신의 가이드를 막는 그 존재에 스티브가 본능적으로 이를 갈았다. 그 모습이 남자에게는 다른 의미로 보여진 모양이었다.


걱정 마. 다음에는 여기보다 더 좋은 장소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입꼬리를 비틀어 웃어 보인 남자는 스티브가 뭐라 채 말하기도 전에 열린 아머 안으로 들어서보였다. 뒤늦게 스티브가 손을 뻗어본 것은 이미 아머는 하늘을 날아오른 뒤였다. 황망한 표정으로 아머가 사라진 방향만 바라보는 스티브의 뒤로 쉴드 요원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캡틴!”


방금 까지만 해도 느껴지던 벅찬 감정들이 모두 사라지고 다시 시끄러운 목소리들이 스티브의 주변을 맴돌았다. 캡틴. 캡틴 아메리카. 자신을 부르는 소리들이 모두 짜증날 뿐이었다.


그래, 아직 테러상황은 끝나지 않았고, 저택 안에는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부상당한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게 더 이상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방금 전까지 이곳에 자신의 가이드가 있었고 지금 그가 떠나버렸는데. 스티브가 이마를 짚으며 크게 휘청거리자 쉴드 요원들이 다급히 그를 붙잡아 주었다.


젠장. 인사라도 제대로 해볼걸. 첫인상이 그런 바보 같은 모습이라니. 뒤늦은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