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함에 스타크가 어깨를 달싹였지만 토니의 머리는 절대 떨어질 줄 모른 채 더욱 바짝 붙어왔다. 결국 포기한 스타크는 배너가 심심할 때 읽으라고 준 복잡한 논문을 빠르게 넘겨 읽어나갔다. 토니의 반대편에서 마찬가지로 스타크에게 머리를 기대던 앤서니가 슬쩍 몸을 일으키려는 기색을 보이자 토니가 앤서니의 옷을 잡고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앤서니의 말에도 토니는 단호하게 페트병을 건네 주웠다. 페트병을 받아든 앤서니는 울상을 지었다. 친근하게 바짝 붙은 세 토니들 건너편에서는 스티브가 스케치북을 들고 킥킥 웃고 있었다.이미 스케치북 대부분을 토니로 가득 채운 걸로도 모자라 개성강한 세 토니들을 모델로 세운 스티브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한 표정이었다. 토니가 그런 스티브에게 아무리 같은 나들이라도 눈 돌리는 건 용서 못한다며 질투를 나타내자 밝아지는 스티브와 별개로 스타크와 앤서니의 표정은 썩어만 갔다.
마침내 하나의 커퀴 벌레로 거듭난 스티브와 토니는 허구한 날 쪽쪽거리며 살인욕구를 불태워주는 훌륭한 빌런으로 재탄생하였다.
배너는 결국 헐크를 불러내고야 말았고, 나타샤와 바튼은 누가 먼저라 할 새도 없이 무기를 꺼내들었다. 쉴드 곳곳에 사내연애 금지라는 팻말이 뜰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한 커퀴 공격의 오늘 피해자는 스타크와 앤서니였다. 쑥스럽게 세 토니를 모델로 함께 그리고 싶다는 스티브의 발언에 토니는 적극적으로 스타크와 앤서니를 붙잡았고, 과장되게라도 최대한 친근한 자세들을 취하도록 하였다.
벌써 몇 시간째인지 모를 모델 활동에 지친 앤서니는 결국 토니가 아닌 스티브에게 동정을 구하기로 하였다.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아?”
“아… 이 부분만 마저 그리고요. 이것만 그리면 정말 끝이에요.”
왜 재촉을 하냐며 토니가 앤서니의 옆구리를 아프게 꼬집었다. 토니와 앤서니가 아프다며 꺅꺅 움직여대는 꼴에 가운데에서 이리저리 따라 흔들린 스타크는 논문에 집중할 수 없게 되자 눈빛만으로 둘을 조용히 시켰다.
마침내 그림을 완성시킨 스티브가 스케치북을 토니들에게 건넸다. 부드럽게 그려진 선들로 이루어진 스케치는 꽤 재능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거기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애정 어린 표현은 그림을 그린 이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일부러 잡은 포즈들 뿐 아니라 스타크와 앤서니가 떨어진 이후 보여주었던 생활 속의 평범한 모습들까지 놓치지 않고 모두 그린 그림 실력에 세 토니는 감탄하였다.
토니는 역시 내 남친! 이라며 격렬하게 스티브의 품에 안겨 키스를 날렸고, 결국 스타크가 스티브와 토니의 얼굴에 논문을 집어 던진 건 당연한 결과였다. 앤서니는 스티브가 그린 그림을 뚫어져라 보다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잘 그리긴 정말 잘 그렸네.”
그 조그만 말조차 캐치한 토니는 콧대를 마구 높였다. 그럼! 내 남친 좀 짱이라능! 앤서니는 못 볼 걸 본다는 얼굴로 토니를 보면서도 그림을 내려놓지 않았다. 행복한 듯 서로를 향해 웃는 자신들의 모습이 어쩐지 위화감이 들면서도 마음에 들었다.
마치 자신은 보지 못한 진짜 얼굴을 누군가 찾아서 보여준 것만 같았다. 그랜트도 내가 웃을 때 이런 모습으로 보아온 걸까? 그랜트에 대한 생각에 앤서니가 쓰게 웃음 짓자 토니가 생각난 듯 물었다.
“너희 쪽 캡틴은 그림 같은 거 그리지 않아?”
“모르겠어. 이런 걸 그릴 줄 아는지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친구 관계일 때 앤서니는 자신이 그랜트에 대해 모든지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그랜트가 고백한 순간부터 완전히 깨져버렸다. 존경하던 친우의 애정 어린 모습들 하나하나가 앤서니에게는 너무도 낯설게 다가왔다. 자신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의 발견에 앤서니는 애써 눈을 돌렸고, 이제 그는 그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림을 쓸어 만지는 앤서니의 눈은 그리움으로 가득 넘쳤다.
“이번에 돌아가면 알아봐야지.”
벌써 이 세계에 떨어진지 한 달이 다 넘어갔지만 망가진 기계의 부품을 다시 찾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오래 잡아먹혔고, 그에 비례하게 앤서니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수척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반면에 스타크는 도대체가 속마음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이었다.
스티브의 품에 안겨있던 토니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박수를 쳤다.
“아! 나 그러고 보니 너희한테 줄 선물들 준비했는데.”
“선물?”
“스티브. 미안한데 내 방 서랍에 올려둔 것들 좀 가져다줄 수 있어?”
“물론이지. 토니.”
스티브는 토니의 뺨에 입을 맞춰 주고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앤서니가 고개를 갸웃했다.
“뭘 준비했는데, 그래?”
“너희들이 좋아할만한 거.”
기대하라며 토니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띄어보이자 앤서니는 그 미소에서 어쩐지 불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곧 그 미소도 지운 채 토니가 슬쩍 스타크의 눈치를 보았다. 다시 주워든 논문을 읽으려던 스타크가 시선을 느끼곤 한쪽 눈썹을 올렸다. 답지 않게 머뭇거리던 토니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괜찮아?”
“뭐가?”
“아니, 그냥. 앤서니랑 달리 넌 좀… 걱정이 되서.”
“니가 나를 걱정해? 니 앞가림이나 잘하시지.”
스타크는 진심으로 어이없단 얼굴로 한껏 비웃어 보였다. 그놈의 익숙하면서도 짜증나는 얄미운 얼굴에 토니가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나지만 넌 진짜 열 받는 놈이야.”
“그게 바로 토니 스타크의 매력이지.”
뻔뻔하게 대꾸하는 스타크의 태도에 보고 있던 앤서니도 못 말리겠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국 논문을 다시 내려놓은 스타크는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어투로 말했다.
“어차피 돌아 가야할 곳이야. 그곳엔 내가 지켜야할 것들이 있고, 해야 할 일들이 있어.”
스타크는 슬쩍 창가로 눈을 돌렸다. 낮이고 밤 구별 없이 언제나 정신없이 복잡하기만한 뉴욕의 모습은 원래 세계에서나 이 세계에서나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단지 스타크의 세계에서였더라면 당장에라도 저 뉴욕 고층건물 사이로 히어로들이 날아다니던가, 오늘이야말로 세계를 정복하겠다며 난동을 부리는 빌런 등이 당연스럽게 풍경처럼 추가 됐어야 했겠지만 이 세계는 겉보기만큼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안 그래도 돌아가면 밀린 일들 때문에 걱정이기는 해.”
마치 동의를 구하듯 스타크가 앤서니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앤서니는 스타크의 태연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백해볼 생각은 없어?”
직접적인 앤서니의 질문에 스타크는 잠깐 주춤했지만 곧 포기했단 투로 대답했다.
“나보단 그에겐 샤론이 더 잘 어울려. 괜한 말을 꺼내서 어벤져스에 지장을 주고 싶지는 않아.”
“그럼 그냥 계속 짝사랑만 하겠다는 거야?”
“너희들 같은 경우가 있듯이 나 같은 상황도 있는 거야. 뭘 그리 열 내고 그래? 모든 게 해피엔딩일수는 없잖아?”
어깨만 가볍게 들썩인 스타크를 토니가 못마땅하게 노려보았다.
“한번쯤 너희 그 잘난 캡틴 아메리카의 얼굴이 보고 싶네.”
“보고 반하지는 마. 아무리 나라도 니들까지 그에게 반하면 기분이 이상해질 거 같으니까.”
“뭐래.”
아무리 같은 스티브 로저스들이라도 세 토니 모두 그래도 내 쪽 캡틴이 좀 더 낫지! 한 속마음들이었기에 다른 토니들이 서로의 스티브 들에게 목매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감하지는 않았다. 뻔뻔스런 태도들이었다. 그래도 토니는 입술을 비죽이며 작게 투덜거리는 걸 잊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도와줄게. 그, 너희한테는 빚도 있고 하니까….”
“니들한테 도움을? 농담이지?”
또 다시 스타크가 콧방귀를 뀌며 무시했지만 앤서니도 토니를 거들었다.
“어차피 우린 모두 같은 토니 스타크야. 괜히 혼자 끙끙거리는 짓 같은 거 너 만큼이나 자신 있게 하는 녀석들이라고. 비록 상황은 달라도 생각 하는 거나 하는 짓은 거의 같으니, 가끔 쯤은 서로에게 기대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옆에서 토니가 앤서니의 말에 강력히 동의했다. 스타크는 그런 둘을 잠시 빤히 바라보았다. 같지만 다른 두 토니 스타크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그럴 수 있다면…. 그러지, 뭐.”
그것이 진심인지 빈말인지 스타크는 스스로 말하면서도 종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괜히 자신의 일에 두 토니를 끼어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둘이 든든하다 느끼고 있는 자신 역시 발견할 수 있었다. 비슷하면서도 다르기에 유일하게 서로를 완전히 감싸줄 수 있는 존재들이 있다는 건 아무리 감추려 해도 제법 기분 좋은 일이었다.
토니가 스타크의 무릎에 누우며 투정을 부렸다.
“그럴 수 있다 면이 뭐야? 나 아이언맨이라고. 세계적 영웅 아이언맨!”
“우리 모두 아이언맨이야.”
앤서니가 토니의 브루넷머리를 잡아당기며 킥킥 웃었다. 그 모습이 우스워 스타크는 웃음을 터트렸다. 유쾌하게 진심을 담아서. 세 토니 모두 서로를 바라보며 마치 어린 소년들 마냥 낄낄거렸다.
“토니. 부탁한 물건이 이게 맞나?”
상자를 들고 돌아온 스티브는 사이좋게 붙어있는 세 토니의 모습을 발견하자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이거 너무 셋이 친한 거 같아서, 내가 질투가 다 나는 걸?”
“오, 질투하지 마. 허니.“
까르르 웃으며 토니가 스티브에게 얼굴을 비볐다. 토니의 애교에 스티브가 행복하게 웃어 보였다. 스티브에게 상자를 받아든 토니는 그것을 각자 스타크와 앤서니에게 나누어주었다. 성미 급하게 스타크가 받아들자마자 포장을 뜯어냈다. 곧 스타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우리 쪽 세계 캡틴 아메리카 한정판 피규어! 색감, 퀼리티, 디테일 한 거까지 완벽 그 자체 버전이지. 내가 그거 구하려고 콜슨이랑 얼마나 입찰 경쟁했는지 알아?”
토니는 끝내 입찰에 성공하여 콜슨을 좌절시킨 그때의 쾌감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지 두 손을 불끈 쥐며 승리의 포즈를 지어보였다.
스타크의 포커페이스가 완전히 무너졌다. 스타크는 완벽한 덕후 빙의된 모습으로 토니가 준 한정판 피규어 상태를 이곳저곳 섬세하게 확인했다. 그리고 판정을 내린 스타크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내가 여기 와서 니가 한 행동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짓이네.”
“다시 뺏어버리기 전에 그 입 조심하는 게 좋을 걸?”
“억만장자가 치사하게 줬다 뺏는 짓은 하지 마.“
다시 내놓으라는 듯 토니가 손을 뻗자 스타크가 기겁하며 피규어를 숨겼다. 어지간히도 마음에 든 듯 얼른 다시 상자에 곱게 포장하는 스타크의 모습에 선물한 토니도 뿌듯하게 으쓱였다. 앤서니가 포장도 안 푼 자신의 상자를 가리켰다.
“내꺼도 같은 거야? 난 피규어 같은 건 모으지 않는데..”
“그래도 가져. 성의를 보라고. 그거 가져가면 너희 쪽 캡틴이 어지간히도 감동 받을걸? 내가 장담해.”
자신만만한 토니의 말에 앤서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상자를 챙겼다. 스타크는 상자 안에 든 편지봉투를 발견하고 그것을 흔들어보였다.
“오늘 크리스마스인거야?”
“아. 그건 나중에 읽어봐. 내가 거기에….”
토니가 말을 멈추고 이상하단 얼굴로 두 토니를 쳐다보았다. 앤서니는 왜 말을 하다 마냐고 물으려다가 스티브도 토니와 같은 표정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왜 그래?”
스티브와 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스티브가 손을 뻗을 뿐이었다. 분명 스타크의 팔을 잡기위한 손짓이었지만 스티브의 손은 허공만을 흩었다. 스타크와 앤서니가 기겁하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앤서니 역시 살짝 흐릿한 모습에 스타크는 방금 스티브가 했던 것과 똑같이 앤서니에게 손을 휘저어보았다. 그러나 잡혀오는 것은 없었다. 심지어 그 흐릿해 지는 게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져가고 있었다.
토니가 황당하단 목소리로 두 토니를 향해 말했다.
“부탁이니 제발 내가 준 피규어 때문에 돌아가게 됐다고는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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