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는 스티브의 품에 안긴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지난번처럼 어벤져스 멤버들을 불러 작별인사를 나눌 틈도 없이 두 토니가 완전히 사라지자 순식간에 타워가 썰렁해진 기분이었다.
스티브가 두 토니의 아머를 가져가야 하지 않느냐 난리를 쳤지만 스타크와 앤서니는 너무도 쿨하게 상관없다고 거절했다. 어차피 두 천재에게 아머는 언제든 만들 수 있는 것이었고, 지금 다시 가지러 쉴드에 가기에는 늦은 감이 있었다.
하지만 쉴드가 아머를 소유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기에 스타크와 앤서니는 토니에게 자신들의 아머를 없애달라고 미션을 주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 스티브는 알 수 없었지만 이미 계획을 다 짜놓았는지 토니는 연신 짓던 불길한 미소로 기대하라며 경고해주었다. 스티브는 굳이 말리지 않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스타크는 아머를 부수는 김에 다른 세계의 통로를 여는 기계 역시 부셔놓으라고 충고하였다. 이번처럼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평행 세계와 엮이면 골치만 아프다는 뼈아픈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건성으로 대답하는 토니가 영 믿음은 가지 않았지만 정말 시간이 부족하였기에 스타크와 앤서니는 아쉬운 작별만을 남기고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한 달 간 치고 박고 놀던 두 토니가 사라지고 나자 어쩐지 쓸쓸함에 토니는 스티브의 품을 더 파고들었다. 스티브는 그런 토니를 더욱 더 강하게 끌어안아주었다.
“이렇게 정말 가버리니 아쉽긴 하네.”
“언젠가 또 만날 수 있겠지. 안 그런가?”
토니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웃음만 지어보였다. 스티브는 그런 토니를 달래주 듯 관자놀이에 키스를 해주었다.
“오늘 저녁은 치즈버거가 어떤가?”
토니가 두 손을 들고 환호하였다. 세 명의 토니 스타크가 생긴 한 달은 이제 끝이 났다. 그들은 떠났고, 남은 것은 원래 세계의 토니 스타크 하나뿐이었다.
스티브와 토니의 발치로 스케치북이 펼쳐져있었다. 나란히 서로의 어깨에 기댄 세 명의 토니 스타크가 마치 가족같이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 § §
앤서니는 눈을 뜨자마자 갑작스럽게 날아오는 폭격에 귀를 막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멀지않은 거리에서 폭탄들이 터지고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이게 무슨 봉변인지 몸을 피하려던 앤서니의 눈에 한 아이가 들어왔다. 난리 통에 부모를 잃은 듯 아이가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를 향해 빌런이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체할 틈 없이 앤서니가 곧장 아이에게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 빌런의 총이 발사되었다. 아이를 자신의 품으로 강하게 안아든 앤서니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누군가 앤서니의 앞을 막아섰다. 앤서니가 눈을 떠 보자 커다란 방패를 들고 총격을 막아낸 사내는 거침없이 빌런에게 방패를 날려 명중시켰다. 익숙한 파란 유니폼의 사내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토니?”
“스티브!”
그토록 보고 싶었던 자기 세계의 그랜트의 모습에 앤서니는 감격에 젖었다. 그랜트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앤서니를 쳐다보았다. 그의 몸이 어울리지 않게 부들부들 떨렸다. 멀리서 다른 멤버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맙소사, 토니? 정말로 토니인거예요?”
반가운 멤버들의 목소리에 앤서니가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곧 숨도 쉬기 힘들 정도의 거구가 앤서니를 안아들었다. 으스러질 듯 강하게 안아오는 두 팔에 앤서니는 깜짝 놀랐지만 이내 그도 마주 그랜트를 안아주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뜻한 그랜트의 품이었다. 조금 숨을 쉬기 힘들다 느낄 때 쯤 그랜트가 고개를 들어 앤서니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토니. 정말로 토니, 자네인건가?”
그랜트의 눈가는 붉어져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사내는 지금이 전장이라는 걸 아는지 초인적인 힘으로 본인의 감정을 조절 하고자 했다. 그러나 눈앞에 앤서니를 더 이상 놓치기 싫다는 듯 얼굴을 잡은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있었다. 앤서니는 그랜트의 굵고 각진 얼굴을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마스크가 씌워진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언제나 변함없는 아름다운 푸른 눈이 앤서니를 담고 있었다. 앤서니는 괜스레 목울대가 따갑다 생각했다.
“나 많이 보고 싶었어? 스티브?”
무너지듯 그랜트가 앤서니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댔다.
“어디로 갔었던 건가. 내가, 내가 얼마나 자네를 찾았는데…. 자네가 없어져서…내가 얼마나….”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그랜트의 목소리는 서러움이 뚝뚝 묻어있었다. 그 어울리지 않게 연약한 모습에 가슴이 아파진 앤서니는 그랜트의 넓은 등을 쓸어주었다. 환하게 웃는 앤서니의 갈색 눈에도 눈물이 고여 갔다.
그 순간 멀리서 또 다시 폭탄소리가 들려왔다. 호크아이가 둘을 향해 멀리서 외쳐왔다.
“감동적인 재회순간도 좋은데, 캡. 우리 지금 전투상황인걸 잊지는 마.”
무방비한 그랜트와 앤서니의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빌런을 향해 호크아이가 화살들을 마구 날렸다. 앤서니를 안아든 그랜트의 눈이 흉흉하게 번뜩였다. 그들이 다시 자신의 앤서니를 빼앗아 가기라도 할 것처럼 그랜트의 기세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앤서니를 안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차마 다시 놓기는 싫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랜트가 자넷을 불렀다.
“자넷. 토니와 아이를 안전한곳으로 대피시켜주게. 토니. 금방 오겠네. 그러니….”
그랜트의 뒷말은 마치 다시 사라지지 말라는 거 같았다. 캡틴 아메리카는 방패를 움켜쥐고 빌런들을 향해 달려갔다.
전장을 향하는 캡틴 아메리카가 어찌나 살벌하였는지 잠시 뒤 앤서니가 새 아머를 꺼내 다시 돌아왔을 땐 이미 상황이 모두 끝난 뒤였다. 허무하단 듯 앤서니가 하강해 내려오는데 멤버들이 난리를 치며 앤서니를 반겼다. 캐롤이 앤서니를 안고 눈물을 훔쳤다.
“우리가 모두 얼마나 걱정한 줄이나 알아요?”
앤서니는 웃으며 모두에게 사과했다. 진짜 앤서니가 맞는지 부산스럽게 확인해보던 호크아이는 그랜트가 다가오자 당연하다는 듯 그랜트에게 앤서니를 넘겼다. 여전히 눈빛만은 흉흉했지만 조금 진정이 됐는지 그랜트가 말없이 앤서니를 꼭 껴안았다. 일단 타워로 돌아가자며 퀸젯으로 멤버들이 그랜트와 앤서니를 밀어 넣었다. 마치 부모님은 대화들 나누라는 듯 그들과 떨어져주었다. 드디어 단둘이 남게 되자 그때까지도 여전히 앤서니를 안고 있던 그랜트가 입을 열었다.
“토니. 보고 싶었네. 정말로. 자네가 보고 싶었어.”
마치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앤서니를 자신의 무릎에 올려 안은 그랜트는 앤서니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안도했다. 앤서니가 떠난 시간동안 어지간히도 괴로웠는지 그랜트의 몰골은 정말이지 말이 아니었다. 수염도 제대로 깍지 못하고, 거친 피부와 기운 한 톨 없는 목소리는 앤서니의 가슴을 너무도 쓰리게 만들었다. 앤서니는 잠시 망설이다 그랜트의 금발머리를 안아주었다.
“나 말이야, 생전 처음 보는 세계에 떨어져있었어.”
앤서니는 그랜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었다.
“거기에 평행 세계의 나랑 또 다른 세계에서 떨어진 녀석까지 합해 토니 스타크가 셋이 되었거든? 토니 스타크가 셋이라니, 정말 놀랍지 않아? 거기다 모두 하나같이 얼마나 우습기 그지없는 녀석들이던지 캡도 만나보았으면 정말 재미있었을 거야.”
앤서니는 말을 하면서 다른 두 토니를 떠올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랜트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팔에 힘을 주었다. 오랜만에 듣는 맹수와도 같은 그르렁 소리에 앤서니는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거기에 평행 세계의 자네도 있었어. 자네랑 비슷하면서 묘하게 다른 친구였는데 웃기게도 그쪽 토니랑 서로 좋아하면서 고백도 못하고 있더라고. 10대 애들처럼 삽질만 하는 게 어찌나 웃기던지… 그런데 그곳에 캡이 나한테 그러더라? 토니 스타크를 사랑한다고. 아, 나 말고 자기네 토니 말이야. 그러다 결국 나중에 둘이 사귀고 나서는 또 얼마나 둘이 매일 쪽쪽거리며 붙어 다니던지, 고역이 따로 없더라고.”
앤서니는 그랜트와 눈을 마주했다. 늘 한결같은 푸른 눈이 앤서니는 언제나 부담스러웠었다. 자신을 훑어 내려가는 그 눈이 무서웠고, 피하고만 싶었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앤서니는 그 안에 담겨있는 자신을 향한 욕망에 똑바로 마주했다.
“그 세계에 있는 내내 질투가 났었어. 우리 쪽 스티브도 저렇게 나한테 늘 날 안아줬었는데. 내 스티브도 나한테 항상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키스해줬는데.”
그랜트는 계속해서 앤서니의 말을 기다렸다. 기다림의 미덕을 아는 캡틴 아메리카는 언제나처럼 앤서니를 기다렸다. 앤서니는 그랜트가 내민 손을 잡기로 하였다. 인내의 끝은 언제나 달았다.
“늦어서 미안해.”
그랜트의 목에 팔을 두른 앤서니가 얼굴을 가까이했다.
“보고 싶었어. 너무도. 스티브. 사랑해.”
앤서니는 그랜트의 입에 처음으로 먼저 입을 맞췄다. 잠시 놀란 듯 그랜트가 두 눈을 크게 떴지만 곧 그랜트도 앤서니의 얼굴을 잡고 진하게 키스를 받아주었다. 뭉글한 혀가 입술을 핥더니 빠르게 혀를 감아왔다. 조금 숨이 가파를 정도가 되었지만 앤서니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그랜트의 목을 꼭 껴안은 채 앤서니는 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 § §
토니 스타크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에 616 지구의 어벤져스 멤버들이 한껏 들썩였다. 죽은 줄 알았던 스타크의 등장에 스파이더맨은 유령인줄 알고 바짓단을 잡고 엉엉 울었고, 울버린은 살아있을 줄 알았다며 반갑게 스타크의 뒤통수를 때려주었다. 감격에 겨운 어벤져스 멤버들의 환영식을 실컷 받은 스타크의 앞에 로저스가 다가왔다. 로저스는 다시 돌아온 스타크를 진심으로 반갑다며 그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그 손짓만으로 스타크는 그제야 자신이 원래 세계에 돌아 왔다라는 현실에 돌아올 수 있었다. 스타크는 로저스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나 없는 동안 고생 많았지? 캡.”
로저스는 스타크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놀라 말할 타이밍을 놓친 것 같았다. 스타크가 무언가 잘못되었나싶어 다시 로저스를 부르자 그제야 로저스가 정신을 차린 듯 자신의 입가를 쓸었다.
“어, 아니. 자네 웃는 게 뭐랄까 좀… 밝아진 느낌이 들어서.”
“그래? 음. 평행 세계에서 요양을 좀 받고 왔더니 그런가?”
“평행 세계에서 꽤나 즐거웠나보군. 얼굴색도 좋아 보여.”
스타크가 그런가? 하며 킥킥 웃었다. 스파이더맨이 호들갑을 떨며 스타크에게 달라붙었다.
“보스. 평행 세계 이야기 좀 더 해줘요. 보스가 셋이었다니 어지간히도 난리도 아니었을 텐데 재미있는 에피소드 좀 풀어 봐요.”
“별거 없었어. 사람 사는 데가 다 거기서 거기지 뭘 또 바래.”
“그러지 말고요. 네? 다른 평행 토니 스타크들은 어땠어요? 혹시 여자였어요? 오우. 내가 말했지만 이건 좀 아니네. 보스가 여자라니. 오 마이 갓.”
“내가 여자면 뭐. 환상적인 미녀일 텐데 뭐가, 오 마이 갓이야.”
스타크는 일부러 스파이더맨의 볼을 아프게 꼬집었다. 그러나 스타크의 괴롭힘에도 스파이더맨은 좋다며 헤벌쭉 웃었다. 정말로 보스가 돌아왔단 사실이 어지간히도 기쁜 모양이었다.
계속해서 멤버들이 평행 세계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자 결국 스타크가 단호하게 대답해주었다.
“재미있었어.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그건 좀 서운한 발언인 것 같군. 토니.”
“그래요! 우리가 얼마나 보스를 걱정했는데 너무해요!”
로저스가 못마땅한지 눈썹을 올리자 스파이더맨도 동의하듯 볼멘소리로 투정을 부렸다. 다른 어벤져스 멤버들도 하나둘 거들며 스타크에게 한소리 했지만 스타크는 장난스럽게 어깨만을 으쓱여 보였다. 그 능글맞은 모습에 어벤져스 멤버들은 모두 얄미우면서도 기쁨을 느꼈다. 그래. 토니 스타크가 돌아온 게 맞긴 맞네.
그때 호크아이가 스타크가 돌아왔을 때 가지고 왔던 상자를 발견하곤 들어 올렸다. 이건 뭐냐며 호크아이가 상자를 가볍게 흔들자 스타크가 기겁하여 상자를 빼앗았다.
“미쳤어? 망가지면 어쩌려고 흔들고 그래?”
“그거 피규어죠?”
스타크는 스파이더맨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대답을 들은 로저스와 모든 어벤져스는 못 말리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놈의 덕후 근성이란…. 스타크가 호들갑을 떨며 상자 안 피규어의 상태를 확인하던 중 안에서 편지봉투 하나가 떨어졌다. 스파이더맨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봉투를 빠르게 낚아챘다.
스타크가 뭐라 말리기도 전에 스파이더맨의 곁으로 멤버들이 몰려들어 편지를 구경했다.
“어…이거 무슨 뜻이에요, 보스? 천재들만의 비밀암호 같은 거예요?”
아리송한 얼굴로 스파이더맨이 고개를 갸웃하자 스타크는 카드를 돌려받아 펼쳐 보았다. 그리고 멤버들과 달리 편지의 글귀를 읽자마자 바로 웃음을 터트렸다. 스파이더맨이 무슨 뜻이냐고 재촉해 물어왔지만 스타크는 스파이더맨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웃어 제킬 뿐이었다.
『니가 더 아까워. 얼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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