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붐붐님 리퀘였던 빌런토니로 시작한 글입니다.
눈을 뜬 순간, 가장 먼저 보이는 아버지의 환한 미소란 그 어떤 비참한 경험보다 가혹한 일이었다. 새벽녘 흐린 하늘 위로 내린 눈이 스티브의 금발 머리에도 내려앉았지만 거세게 몸을 흔들며 반항하는 탓에 추위 따위는 느껴질 틈조차 없었다. 스티브를 잡아끌던 남자가 거친 욕설을 하며 뺨을 내리쳤다. 어찌나 세게도 내리치던지 핑 하고 눈앞이 돌아가더니 입 안 가득 피 맛이 맴돌았다. 절망감이 온 몸을 엄습해왔다.
남자가 뒷머리를 잡아당기며 스티브를 트럭으로 잡아끌었다. 어떻게든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텨보려 했지만 체구 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때 저 멀리 후미진 골목길 사이로 누군가 안개를 뚫고 달려오고 있었다.
"젠장, 스티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든 순간, 곧장 스티브를 끌고 가려던 남자의 면상에 주먹이 날아왔다. 체중을 실은 강한 주먹에 남자가 골목길 바닥을 나뒹굴었다. 같이 바닥을 나뒹굴 뻔한 스티브를 버키가 잡아 일으켰다.
"뭐하고 있어! 도망쳐!"
"버키?!"
"씨발, 이 새끼는 또 뭐야?!"
금방 몸을 일으킨 남자가 버키에게 달려들자 버키는 거리를 유지하며 발로 남자의 명치를 걷어찼다. 남자의 입에서 더러운 침이 튀어나왔다.
소란을 들은 듯 트럭 앞쪽으로 담배를 피고 있던 이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머뭇거리는 스티브를 잡아끌며 버키가 앞으로 내달리자 스티브도 그제야 수적으로 불리함을 깨닫고 버키의 뒤를 따라 달렸다. 그러나 그 순간 누군가 스티브의 등을 밀어냈다. 일어나려는 스티브의 머리를 잡아 누르는 손힘이 어찌나 억센지 팔이 등 뒤에서 비틀어지는 통증이 끔찍했다. 머리카락을 움켜쥔 아버지의 웃음이 번들거렸다.
"씨발 놈의 새끼. 어딜 도망가려고…! 으억!"
아버지의 턱을 향해 날아간 버키의 발차기에 스티브를 내리누르던 손의 힘이 풀렸다. 스티브는 몸을 틀어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버키가 내민 손을 잡으려했다.
탕-! 등 뒤에서 들려온 총소리는 마치 귀를 찢어버릴 듯이 음산했다. 그리고 그 총탄의 괘도가 친구의 피를 튀기게 만들었을 때, 스티브는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멈춰버리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졌다. 다시 한 번 머리가 통째로 짜부라지는 것 같은 아픔과 함께 얼굴이 바닥을 기었다. 스티브의 머리통을 꽉 누른 손바닥을 타고 미치광이들처럼 연신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병신새끼들. 지랄하고 자빠졌네."
"이봐, 여기 손 좀 꽉 잡아봐! 이 새끼들 두 다리를 박살내버려야겠어."
"안되지, 안돼. 상품에 흠집 내서야 쓰나."
능글맞은 목소리가 뚜벅뚜벅 구두소리를 내며 스티브에게 다가왔다. 버키를 향해 총을 쏜 금발머리의 남자가 스티브의 손을 지려 밟으며 웃고 있었다. 버키의 피가 눈앞에서 일렁이듯 흘러내렸다. 친구의 핏물이 스티브에게 닿자 목구멍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킬리언은 스티브의 비명소리가 듣기 싫다는 듯 갈비뼈를 발로 차며 뒤에 남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트럭에 실어. 그리고 저기 쓰러진 놈도 같이."
안개 낀 새벽녘, 괴물들의 손이 어둠 속에서 스티브에게 내뻗어졌다. 희미해지는 시야 속, 아버지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나 깨달은 듯 겁에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도움의 손길은 뻗어지지 않았다. 버키가 남자들의 손에 이끌려 스티브와는 다른 트럭에 실어졌다. 출발하는 차의 마지막 풍경처럼 울퉁불퉁한 좁은 골목길과 그들의 고향이었던 지저분한 거리가 멀어져가고 있었다.
§ § §
이마에서 흐르던 뜨뜻한 피가 코끝에서 방울져 떨어졌고, 둔탁하게 부딪힌 육신이 여기저기 통증을 호소했다. 스티브는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떠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보고자 했지만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얼마나 차를 타고 이동한 거였을까. 기억은 드문드문 끊겼고, 쉴 새 없이 이루어진 폭행은 그나마 남아있던 정신조차 유지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마지막 기억 속 거대한 저택 같은 곳을 본 거 같았는데. 엉망이 되어버린 스티브의 상태에 누군가 짜증을 부리며 지하실 같은 곳에 그를 내던져버렸었다. 아마 이대로 죽어버리면 손쉽게 시체를 처리하려고 방치해둔 듯싶었다.
그때 어디선가 문 여는 소리와 함께 빛이 스며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시립도록 아파왔다. 빛을 등지고 걸어오는 사람의 인영이 마치 자신을 구원해주러 온 천사 같아 보이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양복 주머니를 뒤지던 남자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스티브 앞까지 다가왔다.
"킬리언 자식, 아주 걸레짝으로 만들어놨네."
어둠과 동화된 듯 한 검은 양복과 검은 선글라스. 그리고 그 속에서 환하게 웃음 짓는 치열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갈색머리의 남자가 바닥에 널부러진 스티브와 시야를 맞추듯 몸을 숙였다.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양복에서 코가 마비될 정도로 독한 담배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남자가 나뭇가지 같은 것을 주워 옆구리를 찔러대었다. 안 그래도 아파죽겠는데 쿡쿡 찌르는 감촉에 스티브가 끙 소리를 내자 살아있다는 걸 확인했는지 남자가 씩 웃음 지었다.
"안녕? 모르모트?"
"누…구…."
바싹 타들어간 목이 쇳소리를 내며 괴기한 소리를 내었다. 스티브는 몇 번 마른기침을 해보았지만 그럴수록 반복적으로 걷어차인 복부가 쥐어짜듯이 괴로울 뿐이었다. 토니가 짧게 혀를 차며 담배를 꺼내들었다. 라이터에서 나오는 불빛이 어둠 속에 일렁였다.
"네 아버지 빚 대신 널 산 사람."
토니가 일부러 담배 연기를 스티브의 얼굴에 흩뿌리며 헤죽 웃어보였다. 약을 올리는 듯 한 그 미소가 못내 얄밉게 느껴졌다.
다시금 스티브의 기억 속 뒤섞인 장면들이 떠올랐다. 술과 도박에 미쳐버린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말리던 어머니의 모습 뒤, 흥분한 아버지의 손에 어머니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마룻바닥을 흥건히 적혀 나가던 핏자국이 식탁 밑에 숨어있던 스티브의 발밑까지 따라 흘러내리는 걸 마지막으로 스티브는 자신의 아버지의 손에 의해 힘없이 바깥으로 끌려 나갔다. 담배 냄새가 역하게 느껴졌다.
"너도 어쩌다 그런 사람을 부모로 뒀냐? 운도 지지리 없는 놈."
토니가 담배 연기를 스티브의 얼굴에 후 불어넣었다. 이상하게 연기를 맡을수록 기억은 뚜렷해지고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날… 어떻게 할 거죠?"
"글쎄, 그건 좀 생각중이야. 킬리언한테 될 수 있으면 실험체들을 많이 구해놓으라고는 했지만 설마 이런 다 죽어가는 녀석까지 끼어 넣었을 줄은 몰랐거든. 약 한번 넣었다고 바로 죽어 버리는 건 아닌 가 몰라."
될 수 있으면 신체 건강한 놈들을 중심으로 데려오라 했 것만 이런 멸치 같은 꼬맹이라니. 토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다시 한 번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 들였다.
실험체라는 토니의 대답에 스티브는 피가 식는 기분을 느꼈다. 자신을 끌고 가던 트럭 안, 어떤 이들은 살려달라며 울부짖었고 어떤 이들은 자포자기한 얼굴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죽음을 앞둔 자들의 얼굴들이었다. 다시금 공포가 온 몸을 엄습해왔다. 스티브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토니의 바짓단을 붙잡았다. 킬리언이 부러트린 손가락이 애처롭게 토니의 바지를 잡고 애원했다. 하지만 선글라스에 가려진 토니의 눈은 자신을 동정하는 건지, 아니면 차갑게 바라볼 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토니가 스티브에게로 가까이 몸을 숙였다.
"네 희생이 좀 더 세계를 평화롭게 할 거야."
허무한 대답에 힘겹게 바짓단을 붙잡던 손이 풀려졌다. 절망감에 고개를 아래로 떨 군 스티브는 토니의 구두 끝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말들이, 살려 달라 애원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도 많았지만 단 한마디의 대답은 스티브에게 현실감만 일깨워줄 뿐이었다. 이 자는 절대 그를 도와줄 마음이 없었다.
"버키는…. 어디 있죠?"
어차피 더 이상 살려 달라 애원하는 건 시간낭비일 뿐이었다. 차라리 자신을 구하려다 역으로 함께 붙잡힌 버키의 생사가 더 중요하게 떠올랐다. 분명 다른 트럭으로 실려 갔던 거 같은데. 트럭 안에서 몇 번이고 버키의 행방을 묻다 도리어 주먹질을 맞던 걸 잊기라도 한 듯 스티브는 제발 가르쳐달라며 토니에게 애원했다.
토니는 버키가 누구냐는 듯 턱수염을 긁적이다가 마치 옆에 누군가 있기라도 하는 것 마냥 허공을 향해 자비스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갑자기 허공에서 홀로그램 하나가 떠올랐다. 허공에 떠오른 버키의 사진에 스티브가 몸을 일으키려다 부러진 갈비뼈의 통증에 다시금 쓰러졌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르님 졸라가 윈터솔져 프로젝트에 사용한다고 러시아 하이드라 본부측 연구실로 가져갔습니다.]
"그 늙은 너구리같은 놈. 자기는 좋은 걸 가져가고 나한테는 이런 녀석이나 보낸다 이거지?"
눈앞에 금발 꼬맹이와 달리 건장한 체격의 버키의 프로필 사진을 본 토니가 나중에 킬리언 자식한테 항의해야겠다며 짜증을 부렸다. 자신과 같은 실험체라는 단어에 스티브가 고함을 내질렀다.
"버키는 상관없잖아요!"
"알게 뭐야. 넌 여기가 무슨 자선단체 쉴드로 보이냐? 하이드라 눈에 띈 니들 운명을 탓해야지."
여전히 성의 없는 토니의 말투에 스티브의 눈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다시 버키가 총에 맞던 순간 온 몸을 휩쓸던 분노가 올라왔고, 눈앞에 있는 저 남자 역시 버키에게 총을 쏜 킬리언이라는 작자와 같은 편이라는 사실에 불꽃이 번져나갔다.
방금 전까지 온 몸을 휩싸던 통증들은 다 잊어버린 듯 곧장 땅을 박차며 스티브가 토니에게 덤벼들었다. 비명인지 악다구인지 모를 고함소리가 토니를 향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스티브의 발악은 갑자기 나타난 기계 팔에 의해 제압당할 뿐이었다. 스티브는 붉은 아머에게 한쪽 팔이 꺽인 채 토니를 당장에라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당신…! 죽여 버릴 거야!"
"그 이야기는 하루에도 삼시세끼로 듣고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돼. 날 죽이고 싶은 녀석들은 차고 넘치니 원하면 너도 뒤에 줄이나 서. 꼬맹아."
다 쓴 담배꽁초가 바닥으로 떨어져 토니의 신발 밑창에 지려 밟혀졌다. 더러운 골목을 나뒹굴던 버키와 스티브의 삶을 비웃기라도 하듯 담배꽁초는 처절하게 짓뭉게 질뿐이었다. 마지막 순간, 총에 맞아 뒤로 쓰러지던 버키의 실루엣이 스티브의 눈앞에 일렁였다.
그 순간 분노를 이기지 못한 스티브가 억지로 몸을 틀어 아머의 복부를 노리며 발차기를 날렸다. 잠시 아머가 몸을 주춤하였고, 그 틈을 타 다시 스티브가 토니에게 달려들었다. 스티브의 주먹이 스치듯 토니의 선글라스를 빗 맞춰 벗겨 트렸고, 벗겨진 선글라스 아래 놀란 듯 다갈색 눈이 크게 뜨여져 있었다. 하지만 그 기회마저 실패한 스티브는 다시 아머의 강인한 손에 의해 바닥으로 제압당했고, 스티브는 피를 토하듯 고함을 마구 내질렀다.
"가만두지 않겠어! 하이드라도! 당신도! 전부 다 죽여 버릴 거야!"
토니는 괴성을 내지르며 발버둥치는 스티브의 팔을 보았다. 뼈를 부러트려서까지 자신에게 덤벼든 스티브의 모습이 토니에게는 인상 깊게 남아졌다. 핏발이 선 채 자신을 향해 저주의 말을 내뱉는 스티브의 악다구니에 토니가 점차 환하게 미소를 터트려갔다. 소름끼치도록 밝은 웃음이었다.
"기대할게."
토니는 얼굴 가득 웃음을 담은 채 지하실 계단을 올라갔다. 뒤에서 들려오는 스티브의 비명소리를 마치 은은한 교향곡 듣는 것 마냥 허공을 향해 토니가 말했다.
"재미있는 생각이 났어, 자비스. 저 녀석 어떻게든 살려놔 봐.“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쓰레기통에서 건진 것 치고는 제법 괜찮은 장난감이야.“
자비스는 굳이 자신의 주인이 또 무슨 재미꺼리를 챙기려 하는 건지 되묻지 않았다. 그저 스티브의 비명소리를 조용히 시키듯 토니가 나오자마자 지하실 문을 닫아버릴 뿐이었다. 문이 닫히며 희미하게 바람이 불어 토니의 소매를 살짝 들어올렸다. 손목 아래에는 몇 번이고 반복해 칼로 그어진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이번에는 이 거지같은 곳에서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몰라."
지하실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와 대조적으로 토니의 표정은 어딘가 고조되고 희망에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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