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새로 들어온 옆방 남자는 아무래도 첫날부터 고통이 상당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늦든, 빠르든 이곳에서 정신력은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참다못한 스티브는 귀를 막고 그 위에 이불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다. 그저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 또한 저렇게 무너져 내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 밖에 없었다. 또 다시 무력감이 스티브를 덮쳐왔다. 정신을 차리고자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콱 깨물었지만 옆방의 비명소리는 더욱 커져갈 뿐이었다. 괴로움에 아무 이름이나 부르며 살려달라는 남자의 비명소리는 소름끼치기 그지없었다. 아마 저 남자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지하실로 내려갈지 모를 일이었다.
아, 버키. 스티브는 버키를 떠올리며 한없이 더 기분이 떨어지는 것을 맛보아야 했다. 버키는 괜찮을까? 러시아 쪽 하이드라 본부라고 했는데, 그곳에서 버키도 자신과 같은 실험체 신세인 것일까.
차라리 처음부터 버키를 끌어들이지 말고 얌전히 끌려갔더라면 버키는 자신의 행방불명에 대해 안타까워할지라도 목숨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었다. 만약…. 옆방의 비명소리가 버키의 비명소리라면. 옆방의 저 남자처럼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살려 달라 울부짖고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끝내 차가운 시체로 버려진다면. 자신 때문에 희생당한 친구의 죽음을 떠올릴수록 스티브는 깊은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이곳에 온 뒤로 수차례 버키에 대한 생사를 물어왔지만 단 한 번도 토니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하자, 스티브 스스로도 점차 지쳐가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귀를 째는 듯 한 비명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낮아졌고, 끝내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적막을 만들어내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스티브의 정신을 계속해서 갉아먹고 있었다.
토니는 턱을 괸 채 CCTV 너머 스티브의 모습을 모두 바라보다가 끝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곧 스티브 외 다른 방 카메라가 연결되었다.
방 안 한가운데 구속구에 묶인 남자가 힘겹게 으으,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토니의 관심은 그의 상태가 아니라 오른팔에 쏠려 있었다. 전쟁의 피해로 깔끔하게 날아갔던 남자의 팔은 처음과 달리 새로운 팔이 자라나 있었다. 다섯 손가락, 손톱하나 할 거 없이 완벽한 신체 복구였다.
"자비스. 전신 스캔해봐."
[약간의 탈진 증세를 제외하고 신체 상태 모두 양호합니다. 오른 팔 역시 완벽하게 정상적으로, 익스트리미스의 폭주는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자비스가 띄어준 자료 속 남자의 상태는 그가 보기에도 완벽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토니의 손톱이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긁었다. 반쯤 실신해있던 남자가 무어라 작게 웅얼거렸다.
여전히 발음이 불확실한 언어가 흘러나왔지만 토니는 그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토니는 영상 속 남자에게 대답하듯 중얼거렸다.
"하일 하이드라."
미련 없이 영상을 꺼버린 토니는 자비스에게 간단한 명령을 내렸다. 곧 복잡한 자료들이 작은 USB 안에 담겨지는 걸 바라보며 토니는 책상 서랍에서 낡고 색이 바래진 오래된 종이 자료들을 꺼내 들었다. 몇 번이고 읽어나간 종이의 모서리가 이제는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자료 상단에는 필기체로 하워드 스타크라고 적혀 있었다.
그때, 문득 오베디아로부터 연락이 왔다는 자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공에서 푸른 화면이 열리기 전 토니는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들을 내려다보았다가 곧 그것을 황급히 치워버렸다.
"아, 오비. 요즘 회사 상황은 좀 어때요?"
"언제나 상향가를 기록하고 있지. 이번에 네 제라코 미사일에 대한 계약이 완료되었단다."
"그거 다행이네요."
풀어진 잠옷 차림새로 오베디아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계약이 잘 된 것보다도 뒤로 스쳐 지나가는 모델 아가씨와의 하룻밤이 어지간히도 괜찮았던 모양이었다. 토니가 가볍게 턱짓을 해보였다.
"그거 제가 사준 잠옷이죠? 잘 어울리시는데요?"
"누가 골라준 건데, 잘 어울리겠지. 그보다 연구는 좀 진천이 있니?"
토니는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글쎄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오류가 많더라고요. 이것저것 고칠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 복잡해요."
토니의 미적지근한 대답에 오베디아는 얼굴이 찡그러지더니 곧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로하고 지친 한숨이 걱정을 유발하는 동작이었다. 토니는 그런 오베디아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쉴드의 움직임이 이상하더구나. 그 애꾸 놈 녀석이 무슨 속셈을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뭔가 뒤에서 일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야."
어차피 이미 쉴드 곳곳에 하이드라가 숨어든 지금, 이미 승패는 확실하게 기울어져 있었지만 오베디아는 오랫동안 쉴드를 이끌어온 퓨리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 예리하고 능구렁이 같은 놈은 특히나 곧 있을 대대적인 프로젝트를 앞둔 상황에서 퓨리의 간섭은 상당히 위험하였다. 그들은 쉴드를 대항할 좀 더 확실한 방편이 필요했다.
"토니, 우리는 군대가 필요해."
"슈퍼 솔져 같은 거 말인가요?"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기로 했잖니. 그건 하워드의 허황된 연구에 불과했어. 안 그래도 그거에 관해서는 졸라 그 미치광이 놈의 예산을 채우는 것만으로도 빠듯할 정도야."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의 연구를 그 너구리 놈한테 가만히 빼앗기기만 할 수는 없잖아요."
끈질기게 주장을 굽히지 않는 토니의 모습에 오베디아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하워드에 대한 토니의 집착은 이용하기 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겨워질 정도였다.
"토니. 넌 이미 익스트리미스로 하워드의 업적을 이겨낸 셈이야."
"그건 내 작품이 아닌 마야 한센, 그녀의 작품일 뿐이에요. 그리고 솔직히 그마저도 불안정한 미완성에 불과하죠."
"그러니 니가 그것을 완벽하게 완성시켜야지."
마야 한센이 만든 불안전한 익스트리미스와 다른 좀 더 체계적이고 완벽한 완성품 말이었다. 토니는 자신이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한순간의 망설임 없이 마야 한센에게 겨누어진 총구를 떠올렸다. 죽기 바로 직전, 그녀가 말했었다. 이 거지같은 곳에서 당장 도망치라고.
"익스트리미스는 훌륭한 군대가 될 거야. 슈퍼솔져같은 이상적인 존재가 아닌 좀 더 현실적인 군대 말이다."
오베디아가 영상 너머로 토니를 가리켜보였다.
"그리고 그러기위해서는 토니, 네 도움이 필요하단다."
"…."
"부디 날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마."
언제나 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이제는 오베디아를 통해 말하고 있었다. 그들이 토니에게 주는 압박감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의미가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토니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절대 오비를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테니까요."
간단한 안부 인사를 끝으로 오베디아는 통신을 끊었고, 연구실은 순식간에 적막만이 감돌았다. 더미가 토니를 걱정하듯 정신사납게 팔을 흔들어대었다.
토니의 시선이 어느 한 끝으로 향해졌다. 펼쳐진 자료들 속 스티브의 푸른 눈동자는 작고 왜소한 체격을 누를 정도로 올곧고 강인해 보였다. 그 강인함은 토니에게 맹렬한 질책을 보내고 있었다. 정말로 이게 옳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토니? 이명처럼 들려오는 페퍼의 질문에 토니는 버릇 적으로 품에서 담배를 꺼내들었다.
"자비스. 킬리언에게 연락해서 당장 이리로 오라고 해."
두통은 이제 머리를 깨트려버릴 것만 같이 아파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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