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독약 냄새가 매번 병치레를 겪을 때마다 가던 병원을 연상케 하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굳게 닫힌 문이 열려 버키가 오늘도 병원 신세냐며 그에게 재미없는 농담을 던질 것만 같았다.
매일같이 험한 일을 하시느라 엉망이 된 어머니의 손이 다정히 자신의 얼굴을 쓸어 만져주면 스티브는 투정을 부리듯 그녀에게 어서 자신의 몸이 건강해져 어머니를 지켜주고 싶다 말할 것이었다. 지금의 나약한 몸이 아닌, 강인한 몸으로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그는 성장할 것이었고, 더 나아가 모든 이들을 지킬 수 있는 군인이 되고 싶었다. 버키는 그런 스티브의 오랜 소망을 들으며 제발 그렇게 되기를 바라니 어서 낫기나 하라며 그를 격려해줄 터였다. 버키의 웃음소리는 언제나 유쾌해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소소하지만 평화롭던 대화들이 모두 모래알처럼 흩날려갔다.
그날,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고 버키마저 총에 맞던 그 모든 장면이 새벽녘의 악몽이었을 뿐이라면. 그런 거였다면.
스티브는 눈가에서 눈물이 흐르는 걸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침대에 구속된 팔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약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이들 하나 제대로 구해주지 못할 만큼 형편없는 몸뚱아리는 제 목숨조차 간수하기 힘이 들 지경이었다. 억울하고, 분노가 올라왔다.
"왜 울고 있어?"
다갈색 눈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하실에서의 포스는 어디로 갔는지 곱슬거리는 갈색머리와 큰 눈망울은 이곳과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 손에 들린 주사는.
주사기를 발견한 스티브가 두 팔을 억지로 풀어내듯 구속구를 거칠게 흔들며 몸부림쳤다. 그러나 구속구는 벗겨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토니가 그런 스티브의 몸부림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질릴 때도 되지 않았어?"
스티브는 토니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 강렬히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정작 토니는 그 모습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괜히 힘 빼지 마. 귀찮으니까."
하지 말라는 스티브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잠시 따끔한 감촉 뒤, 날카로운 주사바늘은 거침없이 그의 혈관을 뚫고 들어왔다. 혈관을 타고 무엇인가 들어온다는 생각에 스티브는 몸서리를 쳤다. 알콜 솜을 주사바늘 부위에 비비며 토니가 마치 잘 참았다는 듯 콧잔등을 툭 쳐주었다.
"어때? 안 아프지?"
다정한 목소리만 듣는다면 주사를 맞기 싫다고 떼를 쓰는 어린 아이가 되는 기분이 들었을 테지만 이미 몇 차례, 저러한 정체불명의 약을 맞고 피를 토하며 죽어나가던 다른 실험체들의 시체를 본 입장에서 토니의 말투는 스티브에게 신뢰를 주고 있지 않았다. 마치 쇼맨십을 보이듯 허공에 손을 튕기자 곧 허공에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스티브는 그것이 자신에 대한 의료 차트임을 알고 있었다.
"흠. 체중이 좀 빠지기는 했지만 영양수치는 나름 정상수치까지 올랐네."
처음 왔을 때보다 많이 좋아져서 다행이라는 말에도 스티브는 눈알만 돌려 토니를 쏘아볼 뿐이었다. 입에 있는 재갈 탓에 나오지 않는 저주의 말들이 눈을 통해 토니에게 말하고 있었다. 토니의 웃음이 짙어졌다.
"저번처럼 혀 깨문다거나 하지 않는다면 풀어줄게."
무슨 속셈인지 눈치를 살피는 스티브와 달리 토니는 장난스러운 태도로 잠금장치 부근을 매만져보였다. 그는 며칠 간격으로 자신에게 투여하는 정체불명의 약들만 빼면 몇 시간이고 구속구를 풀어주는 등 종종 스티브의 편의를 돌봐주는 이런 이상한 행동을 하곤 했다. 매일같이 토니의 실험실을 거칠 때마다 죽어나가던 다른 실험체들과는 확연한 차이였다. 스티브는 저 남자가 자신에게 노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자신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조금도 없다는 사실 뿐이었다. 토니는 스티브가 얌전히 눈을 깜박이는 것을 긍정으로 들은 듯 그의 금발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길어진 머리가 눈을 찌르고 있던 것을 배려해주는 동작 같아 보였다.
"굿 보이."
아니, 개를 쓰다듬는 것인가. 토니의 간단한 명령만으로 절대 풀려나지 않을 것만 같던 구속구가 허무하게 풀려 나갔다. 손목에 난 자국을 매만지던 스티브는 토니를 바라보며 첫마디를 뗐다.
"나한테 뭘 주사 한 거죠?"
"1시간 안에 심장이 일반인의 4배 이상으로 뛰다가 자기 혼자 터져버리게 만드는 약물."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토니의 말에 스티브는 싸늘하기만 했다. 언제나 약의 정체에 대해 물어왔지만 매번 들려오는 대답은 그를 놀리려는 의도의 말 뿐이었다. 처음 저 말을 들었을 때만해도 정말 몇 시간 뒤면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 밤잠을 설치던 것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그의 가벼운 태도가 경멸스러웠다.
"농담이잖아. 웃어."
스티브는 토니의 옆에 놓인 메스를 흘겨보았다. 지금 손을 뻗는다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스티브는 들었던 손을 다시 얌전히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토니의 뒤로 붉은 아머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 토니를 만날 때도 그랬지만, 계속되는 기회에도 매번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저 인공지능은 토니와 달리 스티브의 행동 하나하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인간같이. 어쩌면 토니가 스티브의 구속구를 풀어주며 자유시간을 주는 데에는 그를 얕본 것도 있지만 저 자비스라는 인공지능에 대한 신뢰도 있을 것이었다.
"어제 저녁 식사에 손도 안 댔다면서? 왜 안 먹었어? 스테이크 안 좋아해? 어제 신경 써서 특식으로 넣어준 거였는데."
"…"
토니가 기껏 신경써준 거였는데 너무 하지 않냐며 툴툴거렸지만 스티브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원하면 자백제라도 넣어줄까? 아마 그 이쁜 입이 네 의지와는 상관없이 술술 잘도 열릴걸?"
"…속이 좋지 않았을 뿐이에요."
미친놈. 스티브는 토니에 대한 혐오심을 최대한 들어내지 않기 위해 분노를 누르려 했지만 이미 그 눈빛만 본다면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토니가 그런 스티브의 마음을 읽어낸 듯 빙긋 웃으며 무엇인가를 불쑥 내밀었다. 후각을 자극하는 강렬한 냄새에 스티브가 얼굴을 찡그렸다. 냄새만 맡아도 토니가 내민 종이 봉지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째 반응이 시시한 걸? 또 속이 안 좋아? 아니면 치즈버거 안 좋아해?"
"별로 안 좋아해요."
"세상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그건 신성모독이라고!"
토니는 스티브의 반응이 믿기 힘들다는 듯 치즈버거의 포장을 푸르며 흥분하였다. 냄새가 더욱 강하게 풍겨졌다.
"이 폭신한 빵 위에 새콤달콤한 소스를 뿌려 아삭아삭하게 씹히는 양상추, 그리고 따끈따끈한 패티와 치즈의 조화! 장담컨데 치즈버거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라고! 얼른 먹어봐. 치즈버거는 식어도 맛있지만 그래도 따끈할 때 먹어야 제 맛이거든."
코앞까지 들이밀어진 치즈버거 냄새에 스티브의 오만상이 찡그러졌다.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는 남자 때문에 치즈버거의 기름진 냄새가 역하게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반사적으로 스티브가 치즈버거를 밀쳐내려는 순간 토니의 눈이 부드럽게 접혔다.
"먹어."
여전히 토니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었지만 방금 전까지의 장난기 가득하던 웃음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이건 권유가 아니었다.
스티브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치즈버거를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크게 베어 문 치즈버거가 목구멍 가득 걸리는 기분이었지만 스티브는 먹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토니의 시선은 집요할 정도로 끈질겼다. 저 남자가 무엇 때문에 그에게 호의적으로 구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언제까지고 계속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단 한 번의 명령으로 차갑게 그를 바라보고 있는 아머는 언제든지 그의 가녀린 목을 부러트릴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다.
스티브가 치즈버거를 반 정도 먹었을 때쯤 문득 토니가 스티브에게로 손을 뻗었다. 긴장한 스티브가 뒤로 물러나려는 것을 무시하며 또 다시 뭉툭한 손가락이 스티브의 앞머리를 쓸어 만졌다. 다시금 애완동물이 된 기분을 맛보며 스티브는 토니의 눈치를 살피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가면 아래 살벌한 표정과 달리 스티브를 바라보는 눈빛은 다정함을 담고 있었다. 스티브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난 말이야. 금발머리를 참 좋아해."
"…?"
"반짝반짝한 게 예쁘잖아. 특히나 햇빛 아래에서 유독 반짝이는 걸 볼 때면 만지고 싶은 충동이 나곤 하거든. 거기다 금발 벽안이면 두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완전히 장난감 취급이군요."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적어도 그게 널 살려두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면 행복한 일이지 않을까?"
스티브가 불쾌감에 얼굴을 찡그리는 것과 별개로 토니의 목소리는 여전히 그를 놀리려는 어투를 담고 있었다. 그제야 스티브는 왜 그렇게 이 남자가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구는지 이유 하나정도는 찾을 수 있었다. 애완동물로도 모자라 대놓고 장난감 취급이란 건가. 남아있는 햄버거가 스티브의 손 안에서 처참히 뭉게져 버렸다.
"난 적어도 행복하다고 생각하거든."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분노가 치솟아 마음 같아서는 얼굴에 주먹이라도 한 대 내리꽂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스티브의 주먹은, 하고자 싶은 말들과 함께 억눌러질 뿐이었다. 스티브는 울고 싶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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