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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지/우리는 너의 비밀을 알고 있다.

[스팁토니] 우리는 너의 비밀을 알고 있다(1)

*616 스팁토니 기반입니다.


빗줄기 소리가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큰 비는 아니었지만 예민한 청각은 유리창 두드리는 소리를 민감하게 들리게 하고 있었다. 거기에 바람까지 불어 빗소리는 유난히 요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결국 스티브는 부스스 눈을 뜨며 미간을 구겼다. 


오늘 비 소식은 없었던 걸로 아는데…. 시간을 확인하기위해 몸을 틀자 바로 옆자리에서 속삭이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3시 좀 넘었어.”

“자네 안 잤나.”


스티브를 배려해 스탠드 조명을 낮게 튼 탓에 토니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얕게 서려 있었다. 스티브는 잠을 쫒듯 손으로 얼굴을 쓸어 넘겼다.


“분명 자네가 잠든 걸 확인하고 잔 걸로 기억하는데….”

“방금 깬 거야. 잠도 더 안 오고해서 말이지. 덕분에 자네까지 깨워버리고 말았군.”


희미하게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더라니 꿈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토니는 얼굴 가득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잠깐 봤다고 하기에는 두꺼워 보이는 양이었지만 스티브는 그것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내일 급한 서류라 한 번 더 확인하고 있었어. 깨워서 미안해.”

“악몽을 꿨나?”


스티브의 질문은 너무도 익숙한 질문이었다. 그들의 관계 이전부터 스티브는 토니의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토니는 자신의 치부를 스티브에게 숨기는 것에 대해 영 재능이 없었다. 아무리 숨기고 감추어도 토니의 비밀은 언제나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토니는 쓰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예상대로 대답이 늦어지기 무섭게 엄하게 이름이 불러졌다.


“토니.”

“내가 꾸는 꿈이라는 게 항상 똑같다는 거 자네도 잘 알잖아. 이 넓은 우주에 또 어떤 불한당 같은 놈들이 지구를 쳐들어오는 꿈이라던가, 모든 게 사라지는 환상적인 꿈이라던가 말이야. 그래도 내 옆에 잘생긴 애인을 보고 금방 정신 차렸으니 너무 걱정 하지 마."

“날 깨우지 그랬어.”

“음, 그건 내 자존심을 너무 깎아내리는 말 같은데.”

“자네가 정말 내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다면 다른 방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겠지.”


히어로들에게 악몽과 불면증은 너무도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토니의 오랜 불면증에 대해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었다. 저 작은 머리에 대체 얼마나 많은 프로그램들이 돌아가고 있을지 스티브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죄책감을 자극하며 토니를 평생 괴롭힌다는 사실이 스티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스로조차 악몽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주제에 토니의 작은 불행조차 신경 쓰는 스티브의 태도는 이기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요 며칠 출장을 다녀오더니 그 사이, 눈에 띄게 수척해진 토니의 모습이 스티브의 시선을 끌게 만들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내가 왜 밤마다 화장실도 못 가는지 잊었어? 매일 밤마다 잠꼬대를 하며 내 허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사람의 잘못이잖아.”

“내가 말인가?”

“기억이 안 나면 기억하는 사람 말이 진실인거야.”

“거짓말이로군.”

“자네가 어떻게 믿냐에 따라 다르겠지.”


상황을 피하려는 토니의 익숙한 모습이 질릴 법도 했지만 스티브는 이번에도 토니에게 질 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의 말꼬리를 잡는 것은 이 긴 밤을 지겹게만 할 뿐이었다. 


스티브는 토니의 팔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별 저항 없이 끌려간 토니는 이불을 끌어 모아 자신의 가슴께까지 덮어주는 스티브의 다정한 모습을 보며 푸스스 웃어보였다. 종이 한 짝 들어갈 자리도 없을 정도로 가슴이 꽉 맞닿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스티브는 토니의 머리칼에 코를 부비었다. 


“요즘 들어 자주 낮잠을 자는 것 같아 좀 나아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군.”


두터운 유리벽을 두드리는 창문 소리가 방 안을 채워가고 있었다. 토니는 잠시 빗소리에 집중한 듯 눈을 감다가 이내 개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저번에 내가 소파에 잘 때 몰래 키스하고 도망친 건가?”

“그때 깨어있었나?”

“깬 줄 알고 있었으면서 모른 척은.”


품 아래로 큭큭 웃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스티브 역시 따라 웃으며 토니의 머리칼을 엉망으로 헤쳐 놓았다. 장난기 가득하면서 낮게 깔린 토니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듣기가 좋았다.


“그럼 팔콘이 우릴 보고 기겁하며 도망쳤단 것도 몰랐다 할 거야?”

“그건 진심으로 몰랐던 사실인데.”


스티브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에 토니는 퍽이나 그렇겠다며 피식 웃어 보였다. 뭐, 덕분에 팔콘의 웃긴 표정을 볼 수 있었으니 스티브를 탓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토니는 자신의 등을 쓸어주는 스티브의 손길을 느끼며 그에게 몸을 기대어갔다. 참았던 졸음이 다시금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따뜻하고 그토록 가지고 싶어했던 안정감이 그의 긴장을 풀어주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토록 이어질 수만 있다면…. 순간, 자신이 든 생각에 토니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멍청한 생각을 한 자신을 향한 맹렬한 비난이 이어졌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그런 토니의 마음과 별개로 스티브는 한순간이지만 토니의 등이 뻣뻣이 굳은 것을 놓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인다 하더라도 작은 움직임은 스티브에게 큰 신호를 주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능숙하게 편안한 얼굴을 연기하는 토니를 바라보며 스티브는 한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자네가 어떤 생각들을 하는지 알고 싶어.”

“…….”


수 백 번 토니를 대할 때마다 느끼는 생각이었다. 숨기고. 계획하고. 정직함과 신뢰로 이루어진 캡틴 아메리카와 토니 스타크는 너무도 다른 대화 방식을 가진 이들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관계가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했듯 모든 것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스티브는 잊지 않았다. 


처음 토니에게 고백하고 도망치려는 그를 붙잡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던가. 끊임없이 나아간 결과를 신뢰하며 스티브는 언제나 그렇듯 참을성 있게 토니를 기다릴 뿐이었다.


가끔씩이지만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는 게 힘들다 느껴질 때가 있어. 아니, 정확히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는 게 내게 스트레스처럼 느껴지는 거겠지.”


토니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섞여 잘 들리지 않았지만 스티브는 그런 토니의 목소리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품 안에 얼굴을 박고 말하는 탓에 숨소리가 가까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그냥…. 악몽을 꾸는 날이면 그게 내 기분을 더럽게 만들 뿐이야. 쉴 새 없이 말이야.”


등을 토닥이는 스티브의 손길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지만 토니는 그 손이 잠시라도 멈추기라도 할까 두려워 신경을 곤두세웠다. 스티브는 통찰력이 지나칠 정도로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말에 작은 의심 하나라도 섞여 있다면 끈질기게 닦달할 터였지만 다행히 스티브는 그런 토니를 달래주듯 이마에 다정히 키스를 해줄 뿐이었다. 


토니는 죄책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래서 요즘 다들 자네를 피해 다닌 거였군.”

“오, 그건 상당히 충격적인 이야기인 걸? 대체 왜? 나한테 깜짝 파티라도 준비해주려고?”


토니가 일부러 눈을 크게 떠보이자 스티브의 눈썹이 올라갔다. 정말로 모르겠냐는 추궁에 토니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딴청을 부렸다.


“물론 내가 요즘 잠을 못 자서 예민하게 굴기는 했지만 정말로 그것 때문에 내가 무섭다고 피해 다녔대?”

“그저께 쉴드 요원 한명이 울면서 뛰쳐나갔다 하던데.”

“스파이더맨이 말했군.”

“부정은 하지 않는걸 보아하니 자네가 한 짓이 맞긴 한가보군.”


토니의 파란 눈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분명 쉴드 요원이 그의 심기를 거슬리는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에게 쏟아진 말들은 평소보다 비아냥 수위가 높은 것들이었고, 지나칠 정도로 예민한 반응이었다. 그 꼴을 스파이더맨이 보았으니 스티브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요즘 보스가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게 군다고 짜증을 내던 스파이더맨을 기억하며 토니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했다. 작은 행동의 변화는 소문을 타기 쉬웠다.


“나중에 꼭 사과할게.”


그땐 너무 잠을 못 자 예민해 있던 토니에게 용건이 있던 쉴드 요원만 재수가 없는 일이었을 테지만 어찌되었든 사과에 걸 맞는 보상을 확실히 정리해야할 것이었다. 


스티브는 토니의 약속을 믿겠다며 그를 좀 더 품 안에 세게 안아들었다. 그의 앞에서 순한 양같이 굴면서도 뒤에서는 고양이마냥 구는 토니가 얄밉게 느껴질 때가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토니를 마냥 미워할 수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게 스티브가 토니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매력중 하나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토니의 등 라인을 따라 스티브는 그의 근육들을 손가락으로 훑어갔다. 확실히 손으로 더듬어갈수록 마른 티가 나는 것 같았다. 불면증에 시달릴 때의 토니는 겉으로 티가 잘 나지 않더라도 평소보다 신경질 적이었고, 스스로를 더욱 혹독하게 대하려 했다. 


스티브는 힘들어하는 토니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허리부근 쪽 살집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토니와 안한지 얼마나 되었지. 최근 반복되는 임무와 어마어마한 서류들로 인해 토니와 개인적인 시간조차 제대로 보내지 못했다는 걸 자각한 스티브는 토니의 목가에 자잘히 키스를 남겨주었다.


“…토니. 정 잠이 안 온다면 내가 숙면에 도움을 줄 수는 있어.”


정신적 피로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육체적 피로부터 시작하는 게 좋지 않냐던 토니의 말을 기억하며 스티브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오랜만에 맡는 토니의 살 냄새가 흥분 감을 고조시켰다. 토니 역시 스티브의 흥분을 눈치 챈 듯 고개를 들어 억지로 입 꼬리를 올려보였다.


“자네가 원하는 건 아니고?”

“굳이 대답할 필요가 있나.”


토니의 바지 안쪽으로 들어간 손이 그 안을 비집듯 손가락이 벌어졌다. 토니가 스티브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댄 채 낮게 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이라 그런 것일까. 스티브는 자신의 허리를 안은 토니의 손이 긴장한 듯 힘을 주는 걸 느끼며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이려 했다.


[삐삐삐삐삐-!]


갑작스러운 호출기 소리에 스티브와 토니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역시나 어벤져스 호출기가 요란스럽게 소리를 내며 그들을 부르고 있었다. 스티브와 토니는 짧게 시선을 마주했지만 이내 짜증과 자포자기가 뒤섞인 표정을 지어보일 수밖에 없었다. 매번 당하면서도 그들의 주 업무를 생각한다면 무엇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지는 정해져 있었다.


토니에게 먼저 수트를 입고 있으라 손짓한 스티브는 호출기를 들어 정확한 내용과 장소를 확인했다. 방금 전까지 다정하게 토니의 이름을 부르던 것과 달리 엄격하고 긴장감 넘치는 캡틴 아메리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 스티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토니는 잠시 머뭇거리듯 침대보를 움켜쥐었다. 토니의 손에는 식음 땀이 잔뜩 배여 있었다. 


빗소리는 이제 천둥을 섞으며 들려오고 있었다. 귀를 울리는 천둥소리에 안도감 섞인 토니의 한숨소리가 숨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