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크는 더미가 건내는 엽록소 주스에 받아들며 어이없다는 듯 더미를 쳐다보았다.
“나 마시라고 주는 거야?”
기잉기잉 소리를 내며 더미가 위 아래로 끄덕이더니 마치 칭찬해달라는 듯 스타크에게 애교를 부렸다. 스타크는 그런 더미의 행동이 귀여워낄낄 웃으며 강아지마냥 더미를 쓰다듬어주었다. 더미의 기분이 더 좋아졌다.
보란 듯이 더미 앞에서 엽록소 주스를 마셔준 스타크는 더미에게 가서 잘 갖다놓으라고 컵을 돌려주었다. 말 잘 듣는 더미가 컵을 가져다 놓는 사이 스타크는 맛없는 엽록소의 맛에 치를 떨며 다시 보고 있던 자료들로 눈을 돌렸다. 스타크의 앞에는 토니와 관련된 기사자료들이 줄기차게 늘어져 있었다.
‘세계를 구한 영웅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 사랑해요.' ‘아이언맨은 위험한 존재입니다.' ‘아이언맨같은 멋진 영웅이 되고 싶어요.' ‘그가 과연 영웅의 자질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 불한당이 말이에요?' ‘토니 스타크…' '아이언맨…'
빠르게 눈을 돌리며 자료들을 읽어나간 스타크는 자신의 턱수염을 만졌다.
이 세계의 아이언맨에 대한 비판적 여론도 많았지만 대체적으로 악동 이미지가 강한 토니를 동경하는 팬 기사들의 수도 상당했다. 이런 류의 기사 글들은 원래의 세계에도 있었기에 글 내용은 낯설지 않았지만 글을 읽을수록 스타크에게 다가오는 기분은 너무도 다르게 다가왔다. 스타크는 영상 하나를 틀었다. 어린아이가 카메라를 향해 해맑게 웃고 있었다.
〔무서운 아저씨가 우리 엄마를 때리려고 해서 너무 무서웠는데 아이언맨이 쨘! 하고 나타나서 나쁜 아저씨들을 모두 혼내주고, 모두를 구해줬어요. 고마워요. 아이언맨. 나랑 우리 엄마를 구해줘서 너무너무 고마워요.〕
스타크는 영상 속 아이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금발머리의 귀엽게 생긴 화면속의 아이를 스타크는 알고 있었다. 빌런의 습격에서 차마 그가 구해내지 못한 소년이었다. 살려달라고 울음을 터트리는 소년을 향해 뻗은 손이 애처로울 정도로 아이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건물에 깔리던 그날의 장면이 눈앞에 재생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구해야했던 히어로는 그 현장에서만 여러 생명들을 살려냈지만 너무 늦게 발견하였다는 이유만으로 가장 어린 도움의 손길을 눈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히어로 활동을 하면서 안타깝게 시민을 완전히 구해내지 못한 상황은 그 일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스타크는 아직도 그 소년의 눈을 잊지 못했다.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세요. 아이언맨.〕
스타크는 괜스레 손을 뻗어 화면 속 소년을 만져보았다. 입체 영상이라 손에 잡혀오는 것은 없었지만 스타크는 엄마의 품에 안겨 웃는 아이의 볼을 쓰다듬어 주기라도 하듯 손을 내저었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했지만 귀신같이 스타크가 아이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빠져 있다는 것을 눈치 챈 로저스는 조용히 스타크의 어깨를 두들겨주었었다. 너무 자책하지 말게. 딱딱한 군인의 위로에 스타크는 쉽게 그러겠노라고 웃어보였지만 오히려 로저스의 위로는 스타크에게 더욱 칼날 같은 죄책감을 쑤셔 박고 있었다.
곁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진짜 영웅과 비교되는 가짜 영웅은 진짜 영웅을 존경하고 사랑하였지만 동시에 그를 질투하고 원망하였다. 이런 속내를 들킬까, 금방이라도 그가 다른 이들처럼 자신에게 등을 돌릴까 언제나 조바심에 두려웠다. 그러나 그가 자신에게 냉정하게 굴 때마다 매번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일을 반복하면서도 막상 스타크는 로저스를 놓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의 자신의 영웅은 이제는 다른 의미로 그의 가슴에 남아 마지막까지 남은 그 기둥마저 무너져버린다면 더 이상 뜯겨 너덜너덜해진 스스로를 지탱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빌런의 누명을 받을 때 로저스의 태도는 스타크를 그 어느 때보다도 비참하게 만들어 내었다. 직접 나서서 자신의 편을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행동을 자제하라던 로저스의 말은 마치 더 이상 자신을 실망시키지 말라던 하워드를 떠올리기에 충분하였다.
자신을 걱정하는 그의 말 한마디가 칼날이 되어 스타크를 헤집고 있었다. 샤론 카터와의 관계도, 아이언맨과의 관계도. 모두 로저스가 천천히 목을 졸라오는 것 같았다. 그것이 너무도 두려웠던 스타크는 몰래 술에 입을 대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로저스가 알았더라면 불같이 화를 낼 거라는 걸 알면서도 스타크는 한편으론 차라리 그가 자신을 완전히 포기해주기를 원했다. 완전히 무너져버린다면 더 이상 이 위태로운 줄타기도 내려올 수 있을 가란 희망에서였다.
그래서였을까. 빌런의 총을 맞고 건물들이 자신의 머리위로 별처럼 쏟아지던 그날. 스타크는 추락하는 중에도 속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더 이상 자신을 향하던 수많은 눈길들도, 냉정하게 내젓던 손길들도. 그리고 스티브 로저스까지 모두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깊어져가는 스타크의 푸른 눈이 가물어졌다.
그때 또 다시 더미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타크는 잠에서 깨어난 사람마냥 더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보기 드문 스타크의 풀린 표정에 더미는 신나하며 다시 스타크에게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이번에는 초콜릿이 들어있는 상자였다. 그것도 이미 토니가 몇 개 주워 먹어 별로 남아있지도 않는 상태의 상자였다. 스타크가 초콜릿 상자를 열어 안에 내용물들을 확인하자 더미가 만족스러워하며 이번엔 드라이브를 주었다. 그리고 곧이어 정체모를 쇠 덩어리며 수건, 티셔츠 등을 차례대로 스타크의 무릎에 쌓아 올렸다. 스타크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다 나 주는 거야?”
더미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더니 혹시 더 줄 것이 없나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다시 무언가 찾으러가려는 더미를 말리며 스타크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내일 나 가는 게 아쉬워서 그래?”
더미의 손이 빙그르 돌았다. 스타크는 그런 더미의 손을 마주하듯 톡 치며 달래주었다.
마침내 기계를 완성시킨 네 천재들은 바로 기계를 시동하지 않았다. 퇴장에는 화려한 피날래와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필요하다는 토니의 말도 안 되는 주장에 따라 그들은 내일 임무에서 돌아올 바튼까지 모이면 모두의 앞에서 작별인사와 함께 헤어지기로 하였다. 사실 토니의 속내는 결국 또 스티브와 틀어졌다며 징징거림을 받아줄 두 사람을 이렇게 보내기 서운해서였을 테였지만 징징거림을 받아줄 정도로 착하지 못한 스타크는 당당히 앤서니를 제물로 자리를 도망쳤다. 술주정뱅이의 술주정 따위는 그때 한 번 받아준 것만으로도 족했다.
“그래. 나도 아쉬워.”
스타크는 더미의 선물들을 내려다보았다. 쓸데없는 잡동사니들이었지만 이것을 준 더미에게 있어서 또 다른 세계의 주인을 위해 뭐하나 더 챙겨주고픈 솔직함이 담겨 물건의 값어치를 올리고 있었다. 스타크는 문득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면 자신도 더미를 만들어볼까 생각했다. 토니 스타크에게 있어서 이런 어린아이 작품쯤 눈 감고도 만들 정도로 쉬운 일이었으니 더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곧 스타크는 그만두기로 했다. 기계를 마음대로 조종하거나 해킹이 가능한 자신의 세계 쪽 녀석들이 이렇게 토니처럼 옆에 끼고 도는 기계 장난감을 가만 나둘 리가 없었다. 바보 같은 더미가 자신을 공격하거나, 부서져 몇 번이고 다시 만들어냄으로 인해 본연의 더미를 잃을지도 모른다 판단한 스타크는 그저 또다시 토니를 부러워하기만 했다. 차라리 포기하고 이렇게 마음먹는 게 이제는 편했다.
스타크는 화면에 자료들을 모두 꺼버리곤 더미가 준 초콜릿을 까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내일이면 그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될 테고, 다시 아이언맨 활동과 자신이 사라져 밀린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 해야 할 일 중에는 당연히 캡틴 아메리카와의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입안에 초콜릿이 쓰게만 느껴졌다.
바튼은 임무에서 돌아오자마자 랩 실로 끌려왔단 사실에 평소보다도 더 뚱한 표정이었다. 거기다 강제로 사람을 끌고 온 주제에 자기들끼리 대화의 장이나 펼치는 토니들의 행동에 짜증이 난 바튼은 가차 없이 몸을 돌려 나가려했다. 그러나 나타샤가 연구실에 등장하며 인사를 하자 바튼은 언제가려고 했냐는 듯 얌전히 랩 실에 남아있기로 했다.
곧이어 스티브와 토르도 따라 랩 실로 내려왔다. 토르는 뼈가 부셔져라 앤서니를 껴안으며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였고, 스티브는 스타크와 가벼운 악수로 인사를 건네었다. 나타샤가 쉴드에 맡겨놓았던 아머를 두 토니들에게 돌려주는 동안 힐끔힐끔 스티브의 눈치를 살피던 토니는 스티브가 자신 쪽을 돌아보자 얼른 다시 기계에 얼굴을 묻었다.
지난번 여기자와의 사건 이후 안 그래도 플레이보이라며 안 좋은 이미지로 박혔을 텐데 그런 모습까지 보였으니 이젠 완전히 그가 자신에게 실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레 겁을 먹은 토니는 의도적으로 스티브의 시선을 피했다. 스티브가 자신을 어떤 의미로 쳐다보는지 애써 무시하면서 말이다.
아쉬운 작별인사가 모두 끝나고 마침내 배너가 기계를 가동했다. 좌표를 입력하자 웅웅 소리와 함께 기계가 시동되더니 빈 공간에서 푸른 포탈이 생겨났다. 포탈을 만족스럽게 바라본 세 토니는 서로만의 의미로 씩 마주 웃었다.
“기계가 정상적으로 작동되니 다행이네.”
“당연하지. 세기의 천재들이 나서서 만들었는데 설마 실패라도 할 거라 생각 한 거야?”
“이제 이별이군.”
토니는 포탈방향으로 한걸음 다가가며 스타크와 앤서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가. 앤서니는 토니의 손을 마주잡았다. 포탈에 푸른빛이 살짝 변했다.
“주변 사람들 생각해서 사고치는 거랑 술도 좀 줄여봐.”
“오, 마지막까지 이러기야? 페퍼로도 모자라 나 자신까지 그런 소리라니, 너무하잖아.”
“또 다른 당신의 충고이니 좀 새겨들어요. 토니.”
나타샤가 끼어들며 앤서니의 말에 동의하자 토니는 나타샤를 향해 혀를 낼름 내밀었다. 대통령을 데려와 봐라. 내가 말을 듣나. 나타샤가 바튼의 어깨에 기대 토니를 다른 토니들과 바꾸고 싶다고 궁시렁거리자 바튼은 나타샤의 향기로운 머리 냄새에 샴푸 종류나 맞추며 장단에 맞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번에는 토니가 스타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스타크는 그 특유의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한걸음 다가갔다. 세 토니가 가까워진 그 순간 포탈이 파지직-! 소리를 냈다. 순간 당황한 세 토니가 주춤하는 사이 포탈이 갑자기 확- 닫혔다. 그리고 순식간에 압축된 것이 터지듯 팡! 하고 폭발이 일어났다.
포탈에 가장 가까이 있던 토니를 향해 스티브가 방패를 들고 소리쳤다.
“토니!”
하지만 폭발의 위력 때문에 스티브의 방패는 가까이 있던 나타샤와 바튼만을 지켜내었고, 세 사람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벽에 부딪혔다. 스티브는 폭발이 끝나자마자 방패를 집어던지고 토니를 부르며 연기사이로 뛰쳐 들어갔다. 역시 따라 벽으로 밀린 토르가 품안에 안아든 배너를 내려다보았다. 괜찮소? 박사? 토르의 빠른 대처로 헐크의 변신을 막은 배너는 최대한 자신을 진정시키며 스티브가 뛰어 들어간 연기를 향해 외쳤다.
“토니는요?!”
배너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연기 사이 손이 불쑥 나왔다.
“나 여기 있어.”
“그는 무사하네.”
거의 동시에 대답한 토니와 스티브의 목소리에 배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아머를 끼고 있던 두 토니가 보호함으로써 무사할 수 있었던 토니는 먼지로 뒤덮인 자신의 옷을 털며 막연하게 망가진 기계를 바라보았다. 폭발의 여파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에서인지 기계는 완전히 부셔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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