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토니 스타크를 상대로 사람들은 천재, 억만장자, 플레이보이, 독지가 등 부르는 호칭들은 다양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616 지구에서 그를 호칭하는 이름이 하나가 더 있었다. 캡틴 아메리카의 팬 보이. 토니 스스로도 부정하지 않는 호칭이었다. 토니 나이 때의 이들 중 캡틴 아메리카 트레이닝 카드를 모아보지 않았던 이는 없을 테지만 토니는 그런 그들 중에서도 가희 덕후 대장이라 불리 울 정도로 캡틴 아메리카 외길인생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아무리 어벤져스들이라도 모르는 토니의 비밀이 있었으니 바로 토니 스타크가 오랫동안 스티브 로저스를 짝사랑해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스티브는 한참 샤론 카터와 연인 관계였고, 토니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해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에게 연애 어드바이스나 해주며 씁쓸하게 속으로 곪아갈 뿐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친구 관계에 불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론에서 토니가 빌런과 협조한다는 기사들이 떠올르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큰 결정적 거짓 증거들이 물밀듯이 솟아나오자 언제나 토니를 물어뜯을 기회를 노리던 이들을 중심으로 시민들은 토니를 비난해나가기 시작했고, 비난의 수위가 평소보다도 지나치게 심해지자 결국 보다 못한 스티브는 토니에게 한동안 행동을 자제 할 것을 조언해주었다. 더 이상의 자극은 토니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토니가 그렇게 스티브의 말을 잘 들었더라면 여러 사건들도 그리 많이 터지지 않았듯이, 언제나 그렇듯 토니는 스티브의 충고를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고 말았다.
현장에 등장한 아이언맨은 건물 곳곳에 숨겨둔 폭탄으로 시민들을 위협하는 빌런 무리를 바라보며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반대편에서 자신을 서슬 퍼렇게 노려보는 캡틴 아메리카가 여간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상황이 종료되면 꽤나 혼이 날 것 같았지만 지금은 일단 시민들의 문제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빌런 무리 뒤에 숨은 아이언맨은 어벤져스 멤버들에게 시간을 끌라 시킨 뒤 빠르게 건물 내 폭탄의 위치들을 파악해 나가였고, 아이언맨은 폭탄 제거에 들어가기 위해 좀 더 빌런 무리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 순간 그 모습이 한 빌런에게 발각되고야 말았다.
아이언맨을 보고 너무도 놀란 빌런은 허둥거리며 비명을 질렀고, 그와 동시에 그만 자신이 들고 있던 빌런 빔을 아이언맨을 향해 쏘고 말았다. 캡틴 아메리카가 토니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아이언맨이 쓰러지는 모습에 시민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고, 그 비명소리에 놀란 또 다른 빌런이 폭탄 중 하나를 터트려버렸다. 곧 폭탄들이 연계반응을 일으키며 폭발음을 내던졌다. 어벤져스가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들었지만 건물의 일부가 무너져 내려갔다. 스파이더맨이 건물 아래로 떨어지는 아이언맨을 외치며 안개 사이로 뛰쳐나갔다.
§ § §
토니는 스티브가 너무도 거북했다.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은 정말이지 순순한 캡틴 아메리카에 대한 존경심과 같은 동료로서의 동료애. 그리고 진한 우정. 딱 거기까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런 토니의 감정과 달리 스티브는 단순히 동료애에 그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스티브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토니는 캡틴 아메리카가 사실 메두사가 아니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만 했다. 정말 몇 분간 돌이 되는 경험을 한 토니는 현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친절하게 자신의 말을 되내여 주는 스티브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리는데 성공한 토니는 스티브의 고백에 힘겹게 거절의 말을 내뱉어 보았지만 그것은 도무지 캡틴을 이해시킬 수 없는 언변에 불과했다.
오히려 스티브는 얼마나 자신이 그를 사랑하는지 모른다 생각했는지 토니를 붙잡고 더욱더 자신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고백하였다. 얼마나 솔직담백한 고백이던지 결국 토니는 얼굴이 발갛다 못해 터지기 일보직전이 되고 나서야 참다못해 그 자리를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토니가 얼마나 기를 쓰고 도망쳤는지 술래잡기는 며칠이고 계속되었지만 언제까지나 도망만 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마침내 토니를 잡아낸 스티브는 토니에게 다시 한 번 자신의 감정을 고백 하였다. 단지 이번 마지막은 저번과는 조금 다르게 끝을 맺었다.
“자네가 그렇게 싫다면 더 이상 자네를 괴롭히지 않겠네.”
애처로운 스티브의 마지막 말에, 그 순간 토니의 머릿속에서 자신이 캡틴 아메리카를 차버렸다는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자신의 영웅, 미국의 영웅 캡틴 아메리카를 말이었다. 토니는 너무도 괴롭고 서글픈 표정을 짓는 캡틴 아메리카가 부디 그런 얼굴을 짓지 않기를 바랐고, 애초에 토니 스타크는 캡틴 아메리카에게 너무도 약했다. 머리에서의 생각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스티브를 붙잡은 토니는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고 그저 아니, 저, 캡. 그게 아니고, 아니, 그러니까…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새빨개진 얼굴과 깔끔하게 넘긴 올백 머리를 벅벅 긁으며 시선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귀여운 짓을 반복하던 토니는 마침내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토니는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파란 눈이 너무도 가까웠다. 금방이라도 닿을 듯 자신을 내려다보는 스티브가 부담스러웠던 토니는 몸을 뒤로 피하려 했지만 그것은 쉬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토니의 뒷머리를 붙잡고 열렬히 키스하는 스티브의 뜨거운 혀가 미칠 것만 같았다. 스티브의 뜨거운 열기가 얼굴은 물론 아래까지 불길이 붙는 느낌이었다. 토니는 키스가 끝난 뒤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스티브의 팔뚝을 붙잡고 잔뜩 꼬인 혀로 캐, 캡…하고 불렀다. 미친 게 분명했다.하지만 토니가 그것을 자각한 것은 그 다음날 자신을 껴안고 있는 캡틴의 팔과 말 못할 통증을 보내오는 허리를 통해서였을 뿐이었다.
그 후로 스티브는 오늘부터 1일! 이라며 토니를 껴안았고, 어벤져스 멤버들은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오히려 이제야 둘이 사귀는 거냐며 두 사람의 사이를 축복해주었다. 그런 멤버들의 반응과 달리 정작 당사자인 토니의 반응은 꽤나 격렬했다. 내가 캡틴 아메리카랑 사귀다니!!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도저히 지금의 상황을 인정할 수 없었던 토니는 자신들을 축복해주는 멤버들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은 스티브와 사귀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려 들었다.
그러다가 언제나처럼 뉴욕 시에 빌런이 나타났고, 빌런은 처음부터 아이언맨이 목적이었던 양 아이언맨만을 집중 공격하였다. 하지만 토니는 그런 빌런을 오히려 약 올리기까지 하면서 장난을 쳐대었으며 그러한 토니의 행동은 빌런보다도 스티브를 화나게 하기에 충분한 행동이었다. 토르의 묠니르 한방에 쓰러진 빌런을 쉴드에 넘겨주고 난 뒤, 스티브는 토니에게 어째서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였느냐며 잔소리를 늘어트렸다.
한참을 잔소리를 듣던 토니는 처음엔 깨갱하고 얌전히 혼이 났지만 쉴드와 어벤져스 멤버들이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아이고, 천하의 토니 스타크가 애인한테 혼나네 하며 뒤에서 놀려대자 순간 울컥한 기분에 캡이 무슨 상관이야! 하고 꽥 소리를 질러버리고 말았다. 미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이미 정신이 나가버린 채 씩씩대며 아머를 입고 날아오른 순간 숨어있던 또 다른 빌런의 등장 후에야 깨달은 사실이었다.
정체불명의 빌런 빔을 정통으로 맞은 토니가 그대로 정신을 잃고 공중에서 떨어졌다. 쉴드나 어벤져스가 미처 손쓸 틈도 없이 토니를 납치한 빌런은 공중선을 타고 재빠르게 도망쳤다.
흐려져 가는 정신 속 스티브의 외침 소리가 들려오는 거 같았다.
§ § §
스티브와 토니의 사이는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좋은 사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애초에 첫 만남부터가 서로에게 썩 좋지 않았고, 서로가 가진 가치관 자체가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 문제였다. 스티브는 토니의 히어로답지 못한 가벼운 태도와 비아냥을 싫어했으며 토니는 농담은커녕 말귀도 제대로 알아먹지도 못하는 답답하기만 한 스티브의 꼰대 행동을 더더욱 싫어했다.
그러다가 어벤져스 멤버들이 A 타워에 입주하게 되면서 회의 때나 긴급 상황에만 마주치던 것과 달리 히어로가 아닌 스티브 로저스라는 청년과 토니 스타크라는 민간인으로써 마주칠 때의 둘의 태도는 조금씩 부드러워졌다고 볼 수 있었다. 예전처럼 으르렁거리며 싸운다기보다는 티격태격하는 태도정도로 두 사람은 조금씩 호전되어갔고, 그 관계는 어느새 점차 호감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 호감이 관심이 되고, 관심이 사랑으로 변한 것은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토니에게 있어 스티브는 차마 자신이 손 델 수 없는 빛나는 영역이었고, 스티브에게 있어서 토니는 자신이 손 뻗기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막혀 있었기에 둘 다 고백도 못 한 채 그저 서로의 주위만 뱅글뱅글 맴돌 뿐이었다.
그렇게 좋았던 둘 사이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하더니 결국 서로의 서운함과 조개성이 참고 참다가 쉴드 회의 도중에 폭발하고야 말았다.
스티브는 당장에라도 토니에게 주먹을 날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화가 머리끝까지 나있었고, 토니도 목에 핏대까지 세워대며 스티브를 맹비난하였다. 결국 보다 못한 퓨리가 중재에 나서 휴식시간을 가지게 했다. 말이 휴식이지 둘 다 열 좀 시키라고 각자 다른 방에 가둬둔 거지만 말이다.
요원에게 끌려 강제로 빈 회의실에 갇힌 토니는 쉬지 않고 입을 조잘거리며 스티브의 흉을 보았다. 그러다 조금씩 머리가 식어가자 토니는언제나 그렇듯 금세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그에게 내뱉은 말들과 스티브가 자신에게 한 말들을 곱씹어보자 기분이 더럽게 우울해졌다.
토니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크게 한숨을 내셨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당장에라도 뛰어가 스티브에게 사과하고 싶었지만 그와 동시에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복합적으로 뒤섞인 자신의 속마음에 토니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한심한 놈이라 욕을 해주고는 핸드폰을 꺼내 페퍼에게 문자를 보냈다. 『페퍼. 오늘 오후 회의는 취소해주라. :)』 일분도 안 되어 페퍼에게 답장이 날아왔다. 『:( 사표 수리해주세요.』 너무하네. 토니는 입을 비죽이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밖에서 문을 걸어 잠갔기 때문에 나가지도 못하게 된 토니는 그냥 남은 쉬는 시간 동안 이번에 새롭게 구상 중인 아머에 대한 설계나 짜는 게 낫겠다 판단하였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아머의 헤드부분에서 스티브의 화난 얼굴이 이어지자 금방 포기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망할 노친네. 멍청한 스타크. 테이블에 얼굴을 대고 눈을 꼭 감은 토니는 다시 회의실에 들어가면 최대한 자연스럽게 회의를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시나리오를 짰다. 물론 스티브와 마주쳐서 할 말도 함께….
복잡한 토니의 머릿속이 웅웅 울리는 기분이었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다. 아무래도 얼마 전에 맞은 빌런 빔이 걱정되었다. 배너의 등에 떠밀려 검사를 했을 당시에는 그 어떤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영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게 찝찝했다. 교통사고도 사고 후에야 상태를 발견한다는데 빌런 빔이라고 다를 리 없을 터이니 아무래도 추가로 검사를 더 해봐야 할 듯싶었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더 커져갔다. 토니는 머리를 붙잡고 끙끙거렸다. 마치 자신의 바로 머리 위에서 나는 소리마냥 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다.
그때 마침 요원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스타크 씨. 이제 그만 나오십… What the Fuck?! 요원이 총을 빼들었다. 토니는 요원이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는 줄 알고 깜짝 놀라다가 곧 요원이 겨누는 게 정확히 자신의 머리 위 방향이라는 걸 깨닫곤 위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웜 홀의 작은 축소판마냥 포탈이 자신의 머리위에 생겨나있었다. 요원과 같이 토니가 What the…?!하고 외친 순간 포탈 안에서 무언가 토니를 향해 쿵! 떨어졌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머리 위에서 떨어진 정체불명의 것에 그대로 깔린 토니의 꽥! 외마디 비명과 함께 쉴드 내 비상 신호가 전체적으로 울려 퍼졌다.
포탈에서 떨어진 것은 아이언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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