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아머가 공중을 가로지르듯 빠르게 날아갔다. 이미 한차례 전투를 맞췄는지 아머는 이곳저곳 망가진 곳이 많아 몇번 균형을 잃기도 했지만 토니는 별거아니라는듯 속도를 줄이려하지 않았다. 젠장할. 갑자기 나타난 빌런 놈들 때문에 벌써 약속시간에 2시간이나 늦어버렸다. 토니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약속장소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아머를 벗어 타워로 날려보내고는 옷맵새를 다시금 다듬었다.
마음같아서는 아머를 입고 멋지게 등장해 방금 막 세계를 구하고 온 애인의 등장이라며 드립을 치고 싶었지만 지난번에 그런 말을 했을 때 그의 표정을 한번 본지라 두번다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토니가 적당히 땀과 먼지에 젖은 얼굴을 소매자락에 닦아내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듯 근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토니!"
다른 사람들이 저렇게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는 또 뭐 때문에 부르나 귀찮음부터 올라오곤 했는데 이상하게 스티브가 이름을 부르며 자신에게 달려올 때면 귀여운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뛰어오는거 같아 마냥 귀엽고 편안함만 느껴왔다. 물론 스티브의 화가 난 목소리는 그들보다 몇배로 무섭게 느껴질때도 많았지만 저렇게 걱정과 애타는 마음을 얼굴 가득 솔직하게 들어낼 때는 그 어느때보다도 기분이 좋았다. 특히나 오늘처럼 방금 막 일을 끝내자마자 보는 애인의 얼굴이란 그 어느때보다도 기분 좋은 일일 것이었다. 토니는 자신보다도 한뼘이나 키가 작은 스티브를 내려다보며 이를 들어내 웃어보였다.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빌런 놈들이 너무 귀찮게 데이트 신청을 해서 떨궈내느라 힘들었거든."
"어디 다치지는 않았나? 뉴스보니 등쪽을 좀 맞은거 같던데. 치료 받아봐야 하는거 아니야?"
스티브의 메마른 손이 토니의 얼굴을 감싸안더니 어디 다친곳은 없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뼈밖에 없는 깡마른 손의 체온이 토니에게 안심을 주고 있었다. 토니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체구도 작고 몸이 약한 애인의 손에 얼굴을 부비며 어리광을 부렸다.
"괜찮아. 아머가 충격을 흡수해서 크게 다치지도 않았어."
"하지만.."
토니는 빙긋이 웃으며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세상 모든 이들이 궁금해하고 관심가져하는 아이언맨의 마음을 쏙 빼앗아간 숨겨진 애인의 정체는 우습게도 몸매 좋은 금발 미녀도, 어벤져스 내 히어로도 아니었다. 그는 남자에, 몸이 약했고, 심지어 히어로 일을 하는 토니와 달리 평범한 민간인에 불과했다. 군입대 신청서마저 거절당할 정도로 수많은 병치례를 앓는 이런 멸치같은 남자에게 토니 스타크가 반하게 된 것은 정말이지 기적과도 같은 일일지도 몰랐다.
거기다 저 허약한 남자를 침대에 눕히는게 아니라 토니가 직접 침대에 누워 위에 올리는 관계라니. 오죽했으면 종종 천식증세를 보이는 스티브를 보고 나타샤가 정상적인 밤일은 가능하냐고 물어올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어떨지는 말안해도 뻔할 문제였다. 물론 토니는 나타샤를 포함해 그런 질문을 하는 이들에게 니들이 쟤 팬티를 벗겨 물건을 봐야 그런 말을 안하는거라고 뻔뻔히 대답했지만 스티브로써는 그 대답이 더 창피할 따름일 것이었다.
토니에게 스티브의 외모나 건강상태는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토니가 스티브 로저스라는 인격자체를 옳바르게보고 반하였듯이 스티브 역시 토니의 돈이나 재능만이 아닌 한명의 토니 스타크로 바라보고 이해해준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중요할 따름이었다. 스티브는 토니에게 절대 곁을 떠나지 않아줄거라는 확신과 토니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물론 자기 아들의 가슴에 강제로 아크 원자로를 달게 하는것만으로도 모자라 아이언맨 일을 하도록 강요하는 하워드가 토니와 스티브와의 관계를 안다면 절대 가만히 있으려하지 않겠지만 토니에게는 평생 아버지의 말에 순종한 착한 아들을 일탈해서라도 스티브를 절대 놓칠 수 없었다.
토니는 뉴스를 보는 내내 자신이 어디 다치지는 않을까, 무슨 큰 일이라도 나지는 않을까하는 스티브의 걱정에 행복감을 느끼며 자신의 품에 스티브를 꼬옥 안아왔다. 보들보들한 금발머리가 토니의 코를 간지럽혔다.
"이번에도 내가 걱정된다면서 현장에 맨몸으로 뛰어오려한건 아니지?"
"..한번만 더 그러면 아예 아머없이 빌런들과 싸우겠다고 날 협박하던건 자네 아닌가."
토니는 순해보이는 얼굴과 달리 늙은이같은 스티브의 말투에 푸스스 웃어보였다. 눈 앞에서 자신의 애인이 빌런들과 싸우는걸 봐야하는 스티브의 심정을 모르는건 아니었지만 민간인 중에서도 가장 최약체의 건강상태를 가진 스티브가 몇번이고 토니의 충고를 무시하고 현장에 달려왔을때는 매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것을 반복해야만 했다. 거기다 아이언맨과 스티브의 관계를 빌런들이 알기라도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 뻔하였기에 토니는 스티브가 반드시 안전한 곳에서 보호받기를 원하였다.
물론 언제나 나라를 위해, 세계를 위해 토니처럼 자신도 싸우기를 원하는 스티브로써는 그것이 상당히 불만인듯 싶었지만 토니는 그저 이기심을 발휘하듯 그가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워드의 강압적인 명령들에 지쳐있던 토니에게 스티브는 절대 잃고 싶지 않은 안식처 그 자체였다. 토니에게 스티브가 다치는 모습을 보는 것도, 행여나 큰 일이 벌어질까 생각하는 것도 모두 끔찍하기 짝이 없는 문제였다. 그리고 그건 아마 스티브도 토니와 같은 심정일것이었다. 토니는 또 다시 스스로에 대한 분한 심정을 이기지 못해 얼굴이 어두워진 스티브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난 아이언맨이야. 스티브."
"하지만 아머를 벗으면 자네는 나와 같은 민간인일 뿐이네. 굳이 자네가 아머를 입고 저들과 싸울 필요는.."
"그럼 스티브 네가 내 아머를 입고 싸워주려고?"
이것 역시 스티브가 토니에게 한차례 제안했던 방안이었다. 토니의 아머는 육체적 약함을 보완해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몸이 안좋은 스티브라 하더라도 그 아머를 입으면 얼마든지 빌런과 싸울수 있는 문제아니인가. 하지만 토니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아머를 입고 싸운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체력조차 없는 스티브에게 아이언맨이란 가당찮은 문제였다. 스티브는 아랫입술을 씹으며 토니의 상처난 뺨을 감싸 안았다.
"내가 토니, 자네를 지킬 수 있으면 좋겠어."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스티브 널 지켜주고 싶어."
토니에게 있어서 아이언맨 아머를 입는 원동력은 다른 이들을 지킨다는 히어로다운 이유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에게 아머를 입힌것은 나이를 먹어 더이상 자신은 아머를 입을 수 없다는 하워드의 욕심이었고, 2대에 걸친 아이언맨의 활동에 시민들은 그저 가업이라는 말을 나불거리며 토니에게 부담감만 줄 뿐이었다. 토니가 아머를 입는 이유는 오로지 스티브를 위해서였다.
스티브를 지키고 싶어 아이언맨이 되는거였고, 스티브가 다른 이들의 죽음에 슬퍼하는게 보기 싫어 남들을 도와주는 것 뿐이었다. 토니에게는 그게 아이언맨의 모든 이유였다.
하지만 스티브는 자신 때문에 토니가 전투지로 몰렸다는 사실이 너무도 싫다는듯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게도 저들과 대적할 수 있을만한 힘이 있다면 좋을텐데.. 나도 자네와 대등한 히어로가 된다면.."
"그런 소리 하지마. 스티브. 히어로가 되는 방법이 반드시 빌런과 치고박고 싸우는것만이 다가 아니란걸 너도 알잖아. 넌 다른 의미로 내 최고의 슈퍼 히어로인걸."
토니가 씩 웃으며 스티브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쪽 부딪혔다. 갑작스런 키스에 스티브의 얼굴이 확 붉어지는 것이 너무 귀여워 더 놀리고픈 마음에 몇번 더 쪽쪽 소리를 내며 입술이며 뺨이며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하자 스티브의 얼굴도 조금은 풀려졌다.
"그것보다 오늘 데이트는 어디로 갈까?"
"병원으로 가자."
"센스없기는. 정말 그러기야?"
그러나 스티브는 고집스럽게 토니의 뺨에 난 상처에 눈을 고정할 뿐이었다. 지금껏 토니가 전투 후 상처 치료도 안하고 곧장 스티브에게 날아와 나중에서야 갈비뼈가 부러졌다던가 큰 화상을 입은걸 본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기에 절대 눈으로 보이는 외관적인 상처만으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토니는 조금도 물러설 기색없어보이는 스티브의 모습에 정말 다친데 없다면서 입을 비죽내밀다가 제대로 확인해봐야한다는 스티브의 대답에 어쩔수없다는듯 어깨를 으쓱이며 은근슬쩍 팔짱을 꼈다.
"그럼 병원말고 스티브네 아파트에 가자. 거기라면 나도 안심하고 치료받을게."
"..토니."
"이번에 국회의사당을 부셔버린 걸로 한동안 정신없이 바쁠거야. 못해도 한달은 볼 수 없을지도 모를껄?"
그런데 정말 마지막 데이트를 병원에서 보내고 싶냐는듯 토니가 눈꼬리를 축 내리며 스티브를 쳐다보았다. 하긴 이대로 병원에 간다면 또 금세를 못참고 찾아온 하워드 때문에 스티브는 뒤로 물러서고야 말 것이었다. 스티브는 문득 하워드를 떠올리며 살짝 눈을 돌렸다. 하워드 스타크. 얼마전 어스킨 박사가 스티브에게 참가해보지 않겠냐며 제안했던 슈퍼솔져 프로젝트에 총 책임자가 하워드 스타크였을 것이었다. 아직 히어로의 수가 열등히 부족하다며 필요성을 강조하는 하워드의 프로젝트는 상당히 위험하고 목숨을 내놓아야할지도 모르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스티브에게 그것은 그의 꿈을 이루어줄 하나의 기회가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토니를 보호할 수 있다. 어쩌면 더 이상 티비를 통해 토니가 다치는걸 보지 않아도 되고, 그를 괴롭히는 것들에 대해 직접 나서서 막아줄 수 있을 것이었다.
"..? 스티브?"
"..그래. 가자."
스티브는 토니의 손을 꽉 부여잡았다. 물론 토니가 이 사실을 안다면 절대 안된다고 반대할 문제겠지만 스티브에게는 토니만큼이나 이기심을 부릴 가치가 있는 도박이었다. 스티브는 토니의 손을 마주 잡은 자신의 앙상한 손이 부디 단단히 그를 보호해주기를 바라며 토니의 턱을 잡아 키스했다. 스티브에게 슈퍼 히어로가 되는 목적은 오로지 토니 한사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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