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자네 술 마셨나?"
늦은 밤, 스티브는 자신의 집 현관문을 두들기는 노크 소리에 나갔다가 예상외 인물의 등장에 상당히 놀라워했다. 확 풍기는 술냄새와 지저분한 옷차림. 토니가 비틀거리며 문 앞에 서서 그를 향해 웃음 짓고 있었다.
"잠깐 좀 마셨어. 들어가도 될까? 오늘 회의도 도망가고 술마신거라 페퍼가 날 찾고 있거든."
토니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지만 스티브는 몸을 비켜줄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 스스로도 지금 자신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찌푸러졌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긴 평소 사이가 안좋은 상대가 이렇듯 밤늦은 시간에 막무가내로 찾아온다면 스티브의 성격상 수상해보이기는 할 것이었다. 어쩐지 입안이 쓰게 느껴졌다. 토니는 마지막 카드를 던지듯 처연하게 말했다.
"찾아올 집이 여기 밖에 없었어."
잠시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스티브는 여전히 탐색하듯 토니를 바라보다가 결국 마지못한다는듯 고개를 까닥여보였다.
"들어오게."
수트를 입지 않은 민간인에 가까운 토니가 슈퍼솔저인 스티브를 상대로 무슨 일을 해보려할 수도 없는 노릇일터였다. 거기다 일단은 동료사이지 않겠는가. 토니는 최대한 스티브와 부딪히지 않으려 노력하듯 몸을 틀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고, 좁아라. 여기 집세 얼마야?"
"자네가 알거 없지 않나."
"쌀쌀맞기는.."
어제 회의 때 토니가 마구잡이로 쏘아붙인것이 아직도 꽁해있는 것인지 스티브는 여전히 쌀쌀맞은 얼굴로 토니가 침대가에 걸터 앉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히어로답지 않은 가벼운 말투도, 방탕하게 노는 저 생활방식도 하나부터 열까지 스티브에게는 모두 거슬리게 느껴졌다. 침대헤드에 머리를 기댄채 토니가 실실 눈웃음을 흘렸다.
"언제쯤 A 타워에 들어올거야? 심지어 번개신까지 모두 타워에 들어왔는데 캡틴이 혼자만 따로 나가 사는건 좀 아니지 않아? 얼마 전에는 콜슨이 우리가 캡틴 아메리카를 왕따 시키는거냐며 화를 낼 정도였다니까."
스티브의 시선이 마구잡이로 풀어 헤쳐진 토니의 셔츠 사이로 유독 붉어진 피부로 내려갔다. 얼마전까지만해도 뭐가 그리 당당한지 목에 난 키스마크를 그대로 풀어헤친채 쉴드 복도를 돌아다니더니 오늘은 여자와 뒹굴고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스티브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조금 풀어진 어투로 대답했다.
"나까지 타워에 들어가면 이제 자네가 찾아올 집은 아예 없어지겠군."
"아, 그게 그렇게도 되겠군."
뭐가 그리 웃긴지 토니가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작게 한숨을 내쉰 스티브는 술이 좀 깨는게 좋겠다며 물을 가지러 몸을 돌렸다. 냉장고 문을 여는 잠깐의 사이에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쉴새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안그래도 이번주 쯤에 들어갈까 생각.. 스타크. 자네 뭐하는건가?"
"앗! 보물 발견!"
침대 밑에 비죽 튀어나온걸 뭔가를 발견하였는지 허리를 숙여 침대 밑에 머리를 박은 토니가 번쩍 침대 아래 물건을 집어들었다. 남자 혼자 사는 방이라면 절대 나올리 없는 스타킹이 토니의 손에 들려져 있었다. 토니는 한껏 놀라움을 표현하며 스티브를 쳐다보았다.
"누구꺼야? 설마 캡이 입을건 아니고. 여자친구?"
"..샤론꺼야. 지난번에 세탁기가 고장났다고 해서 잠시 내 세탁기를 빌렸는데 그때 떨어진 모양이군."
"샤론이라. 아, 기억나. 샤론 카터. 쉴드에 유능한 요원이라지. 실력도 좋고 몸매도 끝내주는 예쁜 여자 요원. 그렇군. 캡이 왜 타워에 안 들어오려한지 알겠네. 내가 너무 눈치 없었어."
스타킹을 빙글빙글 돌리며 토니가 실실 쪼갰다. 스티브는 저 얄미운 입이 한대 때리고 싶다 충동을 느꼈다. 활짝 웃는 입과 대조되게 토니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런거 아니야. 그녀는.. 그냥 이웃사촌일 뿐이지."
"괜찮아. 이웃사촌이 세탁기 좀 빌리고, 잃어버린 세탁물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어찌어찌해서 침대 좀 뒹굴고, 섹스도 하고 애인도 되는 경우 나도 많이 들어봤는걸."
"..스타크. 자꾸 이상한 소리 할거면 돌아가는 게 좋겠군."
스티브의 경고에 토니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입을 다물었다고해서 이상한 짓을 그만둘 생각은 없어 보였다.
"자네, 지금 뭐하는건가?!"
스티브는 갑자기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어붙여 스타킹을 신는 토니의 행동에 기겁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토니는 태연히 스타킹 두 짝을 모두 신고는 팔을 뒤로해 몸을 뒤로 기울여 높게 들어올린 자신의 다리를 감상했다. 까슬한 나이론 소재가 썩 나쁘지 않았다.
"나도 나름 다리 라인 예쁘지 않아? 이렇게 보니까 정말 여자 다리 같은걸? 아주 섹시해!"
"당장 벗게."
"내가 알기로 스타킹은 군대에서 행군할 때 마찰이 적어 물집이 안 잡힌다고 종종 신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던데. 그거 진짜야? 아, 그리고 또 옛날에 세계대전 당시 스타킹으로 낙하산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스타크!"
결국 참지못한 스티브의 언성이 또 다시 높아졌다. 스타킹의 탄성력에 대해 고심하던 토니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러나 금방 언제그랬냐는듯 스타킹 신은 두 다리를 꼬며 토니가 씩 웃어보였다. 스타킹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토니의 모습이 요염하고 유혹적으로 븨쳐졌다.
"벗기려면 캡이 벗겨. 난 벗기 싫으니까. 이거 은근 따뜻해서 기분좋은걸?"
토니는 실시간으로 스티브의 얼굴이 망가지는 모습을 감상했다. 웃음짓는 얼굴과 대조되게 침대 커버를 쥔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날 놀리는게 재밌나?"
"난 캡 놀린적 없어. 내가 캡한테 하는 모든 말들은 언제나 진심인걸?"
"이런거 재미없어. 스타크."
단호한 스티브의 대답에 토니가 드물게 입을 꾹 다물었다. 장난끼 가득하던 눈이 아래로 떨어졌다. 또 다시 내려앉은 무거운 침묵. 그들은 침묵이 거북했다. 결국 토니가 숨을 내뱉듯 중얼거렸다.
"맞아. 재미없지."
더 이상 스티브를 놀리고싶지 않아졌는지 토니가 순순히 스타킹을 벗었다. 입을 때보다 손가락을 넣어 느릿하게 벗어 내리는 동작이 유독 섹시하게 느껴졌다. 애써 눈을 돌리려해도 굳어진 몸은 토니에게 돌아가려하지 않고 있었다. 아래로 벗겨지는 스타킹 사이 매끈한 맨다리가 그대로 노출되었고, 아래로 숙여진 토니의 속눈썹이 유독 길게 보였다. 스티브는 외적인 모습에 정신이 쏠려 토니의 표정을 미처 살피지 못했다.
"음. 다 늘어나버렸네. 뭐, 적당히 변명해서 미안하다고 밥먹을 구실로 좀 삼아봐. 아마 그녀도 좋아할걸?"
헤죽 웃은 토니는 처음 신었을때보다 모양이 구겨진 스타킹을 들고 자리에 일어서 뻣뻣하게 굳어있는 스티브에게 억지로 쥐어주었다. 방금전까지 토니의 다리에 신겨졌던 스타킹의 체온이 그대로 느껴져 하마터면 놓칠뻔한 것을 억지로 꽉 쥐었다.
"욕실이 어디야? 잠 좀 깨게 잠깐만 씻고 바로 갈게. 몸에서 술냄새 밴 상태로 돌아가면 페퍼 잔소리가 두배로 늘거든."
자신의 손에 쥐어준 스타킹을 한번 쳐다본 스티브가 말없이 욕실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전히 최대한 스티브와 부딪히지 않으려 노력하며 토니가 욕실로 발걸음을 옮겨나갔다. 희미하게, 마치 환청처럼 조그마한 목소리가 스티브의 귀를 스쳐지나갔다.
"부럽네.."
스티브는 그 말을 잘못 들었다 생각했다. 그저 토니가 쥐어준 스타킹에 정신이 쏠려 너무 가볍게 지나치고 만 것이었다. 토니의 발걸음 소리는 너무 가벼워 잘 들리지도 않았다. 한참을 스타킹을 본 채 생각에 잠겨있던 스티브는 괜시리 머리속을 스쳐지나간 생각에 기겁하며 정신을 번쩍 차렸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스티브는 확 붉어진 얼굴을 가리며 욕을 씹었다. 스타크의 장난에 또 한번 넘어간 것이었다. 스티브는 신경질적으로 쓰레기통을 찾아 그 안에 스타킹을 쑤셔넣었다. 샤론에게는 나중에 실수로 청소중 잃어버렸다 말하면 될 일이었다.
그저 스티브는 자신의 마음 한구석을 누르는 스타킹을 버린채 집안에 풍기는 술냄새를 쫒아내고자 창문을 모두 열었다. 세찬 바람이 스티브의 뺨을 때리는 것 같았다.
이날 있었던 일을 스티브는 토니가 욕실에 나와 자신의 셔츠를 입고 나갈때도, 그가 쓰레기통에 버려진 스타킹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던 것도 모두 외면한채 그저 평생동안 두고두고 후회할 뿐이었다. 스티브는 그렇게 토니의 용기를 무시해버리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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