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에서부터 타들어간다는 표현이 나올정도로 뜨거운 태양빛의 집중공격을 받는 기분이었다.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았고, 바람은 커녕 습한 공기만 올라오고 있었다. 가만히 있기만해도 땀이 주륵주륵 내리는 햇빛 아래에서 토니는 신경질적으로 모자를 더욱 깊이 눌러썼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짜증에 속으로 욕이라도 씹고 있는데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벤치에 앉아있는 토니 앞에 스티브가 아이스크림을 내밀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먹을 텐가?"
"됐어. 내가 지금 댁이랑 무슨 데이트라도 하러 나온줄 알아?"
토니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듯 아이스크림을 치워버렸다. 토니의 단호한 거절에 어색함이 흘렀고, 스티브는 잠시동안 아이스크림을 든 자세로 가만히 서 있었다. 괜시리 토니의 입술이 초조하게 오물거려졌다. 더위에 지친 딸기 아이스크림이 스티브의 손을 타고 끈적하게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썬글라스 안으로 흘겨보던 토니는 들으라는듯이 대놓고 투덜거렸다.
"오랜만에 휴일인데 캡시클이랑 이게 뭐하는 짓인지."
스티브는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보통 이쯤되면 토니의 비아냥에 똑같이 한마디정도 쏘아줄만도 하것만 최근들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스티브는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스크림만 바라볼 뿐이었다. 두 사람의 침묵 속 멀리 공원을 걷는 사람들의 대화소리만이 주변을 지나갔다.
차라리 블랙카드를 달라고 하던가 하지 왜 하필 저 스티브 로저스랑 친해지기 타임을 가져야 하는건지. 토니는 장난으로 했던 나타샤와의 내기에서 져버린 2시간 전에 자신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차라리 토르나 바튼이면 몰라도 굳이 스티브를 꼽아낸대에는 분명 여우같은 스파이가 뭔가 노리는 것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었다. 토니의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선명히 들리는 기분이었다.
그때 스티브가 어딘가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짧군."
토니는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인가하며 고개를 들어 스티브가 바라보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거리에서 여학생들이 수다를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토니는 어디 유명 사립학교 교복인가 생각하다가 스티브가 말한 짧다라는 의미를 깨닫고 헛웃음을 지었다.
"우와, 설마 지금 쟤네 치마보고 그런거야? 캡. 진짜 꼰대같다."
아이스크림이나 들고 서 있는 주제에 애들 치마보고 짧다라는 소리가 나온다니. 토니는 비웃듯 입꼬리를 잔뜩 비틀어 웃어 보였다. 드디어 스티브의 얼굴이 찌푸러지는데 성공했다.
"아직 학생이잖나."
"학생이 뭐. 저 나이 때면 한참 저러고 싶을 나이지. 안그래도 학교다니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일텐데 굳이 저런것까지 간섭하려들면 애들 숨통이나 좀 트이겠어?"
"그래도 학생은 학생다운 복장을 갖춰야하는거야."
"어디 뒷골목에서 약이나 안하는것만해도 충분히 학생다운걸. 범생이같이 굴지마. 캡틴 너드."
스티브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다시 둘 사이에 침묵이 내리앉았고 멀리서 여학생들의 웃음소리만이 지금의 두 사람을 비웃듯 들려올 뿐이었다. 다시금 스티브가 토니에게 질문을 던졌다.
"토니. 자네도 어릴 때 기숙학교에 다녔다 했었지."
"..몰라. 난 그때 약하느라 바빠서 옷같은거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어."
귀찮다는듯 토니가 턱을 괸채 고개를 돌려버렸다. 기숙학교라.. 어린 시절, 제대로 된 유년기를 보내기도 전에 아버지가 보내놓은 기숙학교 시절은 토니에게 감추고 싶었던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촉매제같은 시간들이었다. 언제나 목을 조여오는 답답한 교복 셔츠와 마냥 바보같기만하던 동년배 꼬맹이들. 그리고.. 그 감옥같던 기숙학교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던 존재에 대한 기억.
태양빛이 이제 얼굴을 공격하고 있었다. 문득 토니는 스티브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스크림은 이제 다 녹아 온통 손을 끈적하게 만들었지만 스티브는 토니에게 무언가를 원한다는듯 자신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떻게든 그 시선을 피해보려했지만 푸른 눈동자는 끈질기게 따라 붙었다. 땀이 주륵주륵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좋아. 캡. 우린 근본적인 문제를 놓치고 있는거 같은데 하나 확실히 알려줄게. 난 댁이 싫어.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고 이렇게 더운 날 억지로 밖에 나와 햇빛을 쬐면서 댁이랑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도 짜증나 죽을 지경이야. 우린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 정도면 되는데 굳이 스티브 로저스와 토니 스타크로까지 서로를 맞춰야할 이유가 있어? 댁도 자꾸 나랑 친해지려고 헛짓하지말고.."
"그 말.. 진심인가? 정말로?"
직접적인 스티브의 질문에 토니가 확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에 스티브 로저스가 싫은 이유 천만가지가 떠돌아다녔지만 정작 자신을 바라보고있는 스티브를 보고 있노라면 거짓들이 전부 깨지는 기분이었다. 스티브가 한발자국 토니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토니가 몸을 주춤거릴뻔했지만 스티브는 마치 배려해주듯 그것을 모른채해주었다.
"냇이 사진 한장을 내게 주었네. 자네 기숙 학교 시절 사진이더군."
망할 스파이. 역시나 다 알고 있다 이거군. 거기다 단순히 알고 있는걸로도 모자라 내 과거까지 파해쳐서 저 양반에게 줘버려? 토니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와 다음에 스티브 입에서 나올 말에 대한 두려움에 온 몸을 떨었다.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제발. 제발 내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기를..
"내.. 인형을 들고 있던데.."
이런 젠장. 차라리 그걸 가지고 자신과 거래를 요구할 것이지 하필이면 스티브에게 사실을 알려주다니. 망할 스파이. 망할 캡틴 아메리카. 망할 과거의 나새끼. 이미 그 사진을 봤다는 것부터 자신의 흑역사가 모두 폭로되었다는 사실에 토니는 선글라스 사이 손을 넣어 얼굴을 묻었다.
어릴적 자신의 영웅 캡틴 아메리카를 동경하며 해온 흑역사 탓에 차마 스티브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거기다 동경하던 영웅을 만나게되자 그 이상으로 감정이 커진걸로도 모자라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상대에게 틱틱거리기나 해대었으니 스티브 눈에는 얼마나 우습고 한심해보였을지 안보고도 뻔할 듯 싶었다. 어떻게든 변명거리를 찾아내듯 토니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토니."
"젠장. 그건 그냥 아버지 취향이었을 뿐이야. 난 그런 엿같은 장난감 원한적도 없고.."
"난 자네가 싫지 않아."
토니가 고개를 팍 들어 스티브를 올려다보았다. 스티브가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행복한듯 환하게 웃음짓는 얼굴이 햇빛 아래 청량하게 내븨쳐졌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피하듯 여전히 토니의 입이 삐뚫어진 말을 뱉어냈다.
"난 싫어. 댁이 싫단 말이야."
"그치만 난 자네가 좋은걸?"
"그건 댁 사정이고 난..!"
"기숙학교 교복이 정말 잘 어울리던데 다음에 다른 사진들도 좀 보여줬으면 좋겠군. MIT 시절 모습도 한번 보고싶어."
너무도 뻔뻔한 요구에 토니가 어버버 입을 벙긋거렸다. 스티브는 그런 토니가 마냥 귀여운듯 웃음소리를 흘리기까지 해보였다. 이미 그의 앞에는 사진 속, 멋드러지는 기숙학교 교복과 어울리지않는 캡틴 아메리카 인형을 품에 안고 방 안 곳곳에 캡틴 아메리카 포스터를 장식하던 귀여운 소년의 모습만이 보여질 뿐이었다. 소년은 자라서 어른이 되었고, 어른은 스티브에게 귀여움과 동시에 사랑의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나름 앞에 서 그늘을 만들어준 것이 무색하게도 토니의 얼굴이 뜨거운 햇빛 아래 잘 익은 토마토가 되어가는걸 감상하며 스티브는 태연히 생각했다. 하워드한테는 사과의 뜻으로 어떤 꽃을 들고가면 좋을까. 무슨 꽃을 들고가든 용서는 잘 안될 것이 분명했다.
토니가 마지막 반항을 하듯 빽 소리를 질렀다. 타들어간 얼굴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댁이랑 나랑 나이차이가 몇인지나 알아?!"
하워드가 알면 무덤에서 나와 비명을 내질렀을 테지만 이미 다 끝난 게임에서 반항은 부질없는 것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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