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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스팁토니]정오님 리퀘/향수

"안녕. 캡."

"..오랜만이군."



오랜만이기는 하지. 토니는 자신을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리고 뒤로 물러서는 스티브의 행동에 속으로 작게 투덜거렸다. 뭐, 캡틴 아메리카가 자신에게 화를 내는 이유로 짚이는 게 한 두 개가 아니기는 했지만 그래도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꽤 사이가 좋아졌다고 여길 정도였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저렇게 손바닥 뒤집듯 자신을 대놓고 피하는 스티브의 모습에 상당히 서운한 감정이 앞서 올라오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라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따라 탄 토니는 스티브가 더욱 자신에게 물러서듯 벽에 붙는 것을 일부러 모른 척 했다.


웅- 하는 엘리베이터 내려가는 소리가 길게만 느껴졌다. 서로를 의식하듯 엘리베이터는 침 삼키는 소리까지 선명히 들릴 정도로 조용했고, 어색함만이 흘러 넘쳤다. 슬쩍 바깥이 훤히 보이는 엘리베이터 풍경을 보는 척 벽에 반사된 스티브의 얼굴을 살피던 토니는 여전히 뭐가 그리 화가 났는지 점점 더 깊어지는 눈썹 골에 입을 비죽였다. 대체 뭐가 그리 불만인건지.. 


결국 참다못한 토니가 뭐라도 말이라도 걸어보려고 벙긋 입술을 열려던 순간 그때 갑자기 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진동음을 냈다.


기이잉- 불길한 소음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작동을 멈추자 당황한 스티브는 경계 태세를 갖추었고, 당장에라도 토니의 허리를 잡아채듯 손을 뻗었다. 그러나 침착하게 천장을 올려다보던 토니가 곧 이것이 단순 기계 오작동임을 깨달고 혀를 차보이자 손은 허무하게 허공에 멈춰 설 뿐이었다.



"아, 이런 젠장 할. 쉴드 기술 관리팀 단체로 월급 깍아 버려야겠네."

"..무슨 문제가 발생한건 아니겠지?"

"설마. 그럼 우리한테 제일 먼저 연락이 오겠지. 그냥 기계 문제일 뿐이야."



걱정하지 말라는 듯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인 토니는 자신이 직접 고칠까하다가 공구가 없는 맨손이라는 사실에 그저 엘리베이터 비상벨을 누르고 쉴드 기술 관리팀에 연락을 취했다. 



"헤이, 월급 도둑들. 여기 지금 캡틴 아메리카랑 아이언 맨이 밀실에 단 둘이 갇혔거든? 급한 상황 아니면 지금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될 수 있으면 빨리 좀 고쳐주지 그래? 빨리 안 고치면 여기 캡시클이 화나서 맨손으로 문을 열어버릴지도 모른다고."

"그런 거 안하네."



금방 상황을 파악한 쉴드 요원이 죄송하다며 5분 안에 당장 고치겠다 대답했지만 토니는 퍽도 그러겠다며 비웃듯 스티브를 돌아보았다. 무언가 쉴드 요원들의 능력에 대해 이죽거리려던 토니는 자신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잔뜩 굳은 얼굴로 심각해보이는 스티브의 얼굴에 하려던 농담들을 도로 삼키었다. 척 보기에도 이 뻘쭘하기만 한 침묵의 시간이 늘어났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숨기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도 댁 못지않게 이 상황이 짜증나기는 매한가지거든? 토니는 속으로 쉴드 기술 관리팀들을 마구 씹어내리며 일부러 스티브에게 등을 돌렸다. 다시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를 감돌았고, 5분 안에 고쳐낸다던 요원의 말은 거짓말이 되어버린 듯 체감적으로 상당시간이 흘러갔다. 결국 참다못한 토니가 혼잣말처럼 허공을 향해 말을 걸었다.



"그래도 페퍼한테 할 변명꺼리가 늘어 다행이네. 오늘 이사진 놈들 만나기 싫었는데. 저번 전투 사건 이후로 얼마나 날 까내리던지.."

“...”



뒤에서 인기척은 분명히 느껴졌지만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보통 이쯤 되면 항상 자네가 고생이 많다며 걱정어린 말 한마디쯤 해주었을 터인데 이제는 아예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고 외면해버리는 스티브의 모습에 끝내 토니가 폭발하고 말았다.



"좋아, 캡. 더 이상 나도 못 참아. 이거 아무리 나라도 상당히 기분 나쁘거든? 일부러 지금 시비 거는 거야, 뭐야 대체?"

"그게 무슨.."

"왜 자꾸 못 볼 거 본다는 듯이 피해 다니는 건데! 아예 대놓고 화를 내던가, 나한테 불만 있으면 차라리 말을 하라고! 그렇게 쫌팽이처럼 혼자 꽁해서 사람 성질 박박 긁지 말고!"



쌓였던 걸 털어내듯 토니가 맹렬히 쏘아붙이자 당황한 스티브가 아니, 자네를 화나게 하려는 그런 의도가 아니라..라며 무어라 변명해보려했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자신에게 더욱 거리를 늘리는 스티브의 모습에 토니가 빽 소리를 질러버렸다. 그럼 뭔데! 결국 벽에 등을 바짝 붙인 스티브가 난감하다는 얼굴로 손등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자네 냄새가 좀 독해서.."

"냄새?"



토니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자 스티브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흘겨보던 토니는 손목 안쪽 자신의 향수 냄새를 맡아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페퍼가 회사 신제품이라며 준 향수를 쓰고 회의에 갔던 날부터 스티브가 얼굴을 찡그리며 자신을 피하기 시작 했던 거 같기는 했었다. 그제야 시간이 지날수록 스티브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는 이유를 찾은 토니는 자신 때문이 아니라 고작 향수 때문이었다는 사실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스티브가 자신을 싫어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이내 안심이 몰려왔다. 



"슈퍼솔져 혈청이 후각까지 올려줬는지는 몰랐는걸."

"전에 쓰던 향수는 그나마 괜찮았던 거 같은데.. 이번 거는 상당히 독한 거 같더군."

"말을 하지 그랬어."

"자네는 그 향수가 상당히 마음에 들어하는 거 같아서.."

"페퍼가 쓰라고 해서 쓰는 거지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는걸. 괜히 그런 거 때문에 계속 참으면서 날 피해 다닌거야? 못살아.."



토니의 타박에 스티브가 부끄럽다는듯 고개를 숙였다. 잠시 또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토니는 자꾸 손을 꼼지락 움직이며 입가를 가리려는 스티브의 모습에 불쑥 말을 내뱉었다.



"토하고 싶어?"



그게 무슨 말이냐며 스티브가 눈을 크게 뜨고 토니를 바라보자 토니가 진정하라며 손을 들어올렸다.



"냄새 독해서 속이 울렁거리는 거잖아. 나쁜 의도로 말한 거 아니니까 그렇게 기겁 하지마."



아무리 그래도 단어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스티브가 눈썹을 찡그렸다. 토니는 슬쩍 비상벨을 흘겨보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참다못한 스티브가 구석에 속을 게어 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리적 문제를 가지고 스티브에게 짜증을 낼 마음은 없었지만 비위보다도 자신 앞에서, 그것도 쉴드 엘리베이터에서 향수 냄새에 캡틴 아메리카가 토를 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싶지 않았다. 토니는 어떻게든 스티브로부터 더 멀어지려다말고 이 좁은 공간에서 그마저도 한계라는 것을 자각하듯 새로운 대책을 찾아내도록 하였다.



"캡. 옷 좀 벗어봐."

"..뭐?!"

"이상한 상상하지 말고, 빨리 잠바나 줘봐."



필요 이상으로 스티브가 얼굴을 붉히며 펄쩍 뛰어오르자 토니는 재촉하듯 손을 까닥여보였다. 잠시 망설이던 스티브가 주섬주섬 가죽 잠바를 벗어 건내자마자 토니는 냉큼 받아들어 옷을 입었다. 덩치가 큰 스티브의 잠바와 어울리지 않게 토니의 소매는 손등을 거의 덮어버릴 정도로 상당한 체격차를 보여주고 있었다. 일부러 냄새를 가리듯 옷을 두른 토니가 소매를 흔들어보였다.



"이제 좀 덜하지?"

"그런 거.. 같군."



확실히 스티브의 체취가 묻어있는 잠바로 몸을 가리자 방금 전까지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독하게 나던 향수 냄새가 조금이나마 가려진거 같기는 했다. 스티브는 자신의 옷을 입고 갈색 눈을 부드럽게 접어 웃는 토니의 미소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다음 회의 때 이 향수 쓰고 오면 직빵 이겠네. 슈퍼솔져 퇴치용으로 쓰기 말이야."

"..."

"알았어, 농담이야. 표정하고는.. 그보다 캡도 무슨 향수같은 거 써?"



옷 안쪽 스티브의 냄새를 맡듯 코를 묻은 토니가 깊게 숨을 내쉬듯 중얼거렸다.



"하긴 노친네가 무슨 향수를 쓰겠어. 그냥 군용 비누 냄새겠지."



감았던 눈을 뜨듯 천천히 스티브를 올려다보며 토니가 빙긋 웃음 지었다. 둘밖에 없는 엘리베이터 안, 토니의 목소리는 나직하게 스티브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네."



방금 전까지만해도 향수 냄새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아파오던 두통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가까이 마주한 토니의 눈망울을 보는 순간 엘리베이터 안 지독하기만 하던 향수 냄새와는 전혀 다른 냄새가 흘러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머릿속에서 누군가 자신의 뒤를 밀어 앞으로 내보내듯 반대편 벽 가에 붙은 토니의 손목을 잡아챈 스티브가 자각 없이 말을 내뱉었다. 



"자네도 괜찮아."

"? 뭐가?"

"그.. 향수 냄새 말이야.."



갑자기 손목을 붙잡힌 토니가 눈을 껌벅였다.



"아까는 역겹다면서?"

"그런 게 아니야.. 그냥.. 그런 향수 냄새보다 자네 본래의 향이 더.. 좋다는 의미이네."



벌게진 얼굴이 혀를 꼬아버린 기분이었다. 스티브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갈색 눈에 빠져들듯 그 눈이 당혹감에서 곧 웃음으로 번져가는 것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개구진 웃음소리가 스티브의 감정을 더욱 키워냈다.



"응큼한 캡시클이네. 내 살 냄새가 그렇게 좋단 말이야?"



일부러 던진 농담에 스티브의 얼굴이 더욱 붉어지는 것을 감상하며 토니는 깔깔 웃음을 터트리려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스티브가 내뱉은 말 한마디는 토니의 입을 다물도록 하였다.



"아마도. 그런..걸지도 모르지."



스티브가 한템포 쉬었다 대답했다. 수리를 맞친 엘리베이터가 다시 웅- 소리를 내며 아래로 내려가는게 느껴졌지만 스티브와 토니 그 누구도 수리가 늦어져서 죄송하다는 쉴드 요원의 말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스티브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토니. 나는.."



땡! 엘리베이터가 마침내 1층에 도착하였고, 곧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안 그래도 해야 할 일들이 많 것만 엘리베이터 고장으로 1층 로비에 모여 짜증을 내던 쉴드 요원들은 문이 열리자마자 눈앞에 보인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의 모습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몇몇은 인사를 건네었고, 몇몇은 두 사람의 어색한 모습에 또 싸우시기라도 한건 아닌가 걱정 어린 표정들을 보내왔다. 그런 그들의 눈을 빠져나오듯 토니가 요원 무리를 헤쳐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스티브가 그 뒤를 따라갔지만 이미 한번 타이밍을 놓친 말은 어색하게 공기 중에 흩뿌려질 뿐이었다. 어느 정도 요원 무리를 빠져나온 토니가 걸음을 멈추었다.



"스티브."



앞으로 걸어가면서도 어디론가 계속해서 문자를 보내던 토니가 스티브를 돌아보았다. 스티브가 놓친 말을 토니는 놓치기 싫다는 듯 살짝 퉁명스럽게 제안했다.



"페퍼가 회의 취소됐다고 문자왔는데 혹시 지금 시간돼? 괜찮으면 같이 점심이나 먹자."



어디 페브리즈라도 사서 뿌리면 향수 냄새도 좀 없어지지 않겠냐며 토니가 스티브의 잠바를 꼬옥 안 듯 소매를 품에 안아보였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 갇혀 있던 것과 달리 밖으로 나오자 더이상 지독한 향수 냄새는 스티브를 괴롭히지 않고 있었다. 스티브는 환하게 웃으며 토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